장재성(오른쪽) 선생과 부인 박옥희씨, 아들 상백군이 1943년 찍은 가족사진. 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고 장재성(1908∼50) 선생의 서거 70주기를 맞아 서훈과 기념사업이 추진된다.
장재성기념사업회는 “27일 오후 5시30분 광주시 산수동 주민공동체 공간 ‘오월의 숲’에서 창립식을 열고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장재성 선생 등의 서훈을 요청하는 범국민운동을 펼쳐나가겠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올해 장재성의 서거 70주기와 한국전쟁 70돌을 맞아 장재성의 모교(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일고 전신) 후배들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회장에는 김상곤 광주일고총동창회장(전 사회부총리)을 추대할 예정이다.
기념사업회는 창립식에 하유성 광주지방보훈청장을 초청해 장재성을 비롯한 독립유공 미 서훈자 72명의 서훈 요청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광주고보(10명), 광주농고(15명) 등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학생 66명과 독립운동을 이끈 사회인 6명이 포함됐다. 또 장재성의 서거 다음날인 7월6일 오전 11시 광주일고에서 ‘장재성 선생 추모제’를 열고 포럼과 토론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1908년 광주에서 태어난 장재성은 26년 학생비밀결사 성진회를 결성해 일제에 저항하다 체포됐으며 29년 6월에는 독서회를 조직해 활동을 이어나갔다. 장재성은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학생들이 ‘일본 학생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사건’ 항의로 시위를 벌이자 투쟁본부를 조직해 같은 달 12일 2차 시위를 이끌었다. 장재성은 다음날 붙잡혀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는 학생독립운동 관련 최고 형량이었다.
재야 사학자들은 장재성이 학생들의 단순 시위를 전국적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장재성은 양조장 등을 운영하며 1945년 8월17일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에 조직부장으로 참여했고 48년 남북대표자연석회의 준비를 위해 월북했다가 이듬해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장재성은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7월5일 광주형무소가 시국사범을 처형할 때 함께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광우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운동의 중심에 섰던 장재성 선생은 6·25 때 총살당해 주검조차 수습되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 빠져 있던 분들을 재조명해 비극적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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