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성심병원 장례식장에 전날 세상을 떠난 5·18유공자 정병균씨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5·18보상금을 모두 주위에 나눠 주고 남은 장례비 500만원이 그의 유품이었다.
2일 5·18기념재단, 5·18단체의 말을 종합하면, 전날 오전 7시께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8층에 거주하던 5·18유공자 정병균(60)씨가 1층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원한 관계나 타살 흔적이 없었던 점, 정씨의 지갑에서 유서가 나온 점을 토대로 정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지난 28일 공과금 125만원을 납부한 정씨는 영수증 뒤쪽에 “관리비 3달, 통신비 1달 더이상 채무 없음. 나머지 돈으로 화장시켜주십시오”라고 유언을 썼으며 500여만원이 들어 있는 통장을 가족에게 남겼다.
정씨는 어렸을 적 부모와 헤어진 뒤 친형(65)과 보육원을 전전하며 자랐다. 1980년 직업소년원에 살면서 구두닦이 생활을 하던 중 5·18이 일어났고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항쟁에 참여했다. 정씨는 대부분 시신운반조로 활동했으며 5월27일 옛 전남도청을 지키다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월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항쟁 때 희생자들의 끔찍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정씨는 석방 이후 가족에게 “대검에 찔려 죽은 사람들이 꿈에 보인다. 나도 자꾸 오라고 한다”고 호소했다. 정씨는 이후 30여년 동안 가족을 포함한 외부와 단절한 채 술에 의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씨는 한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한명 두기도 했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지면서 부인과 헤어지고 자녀는 미국으로 입양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정씨의 형은 “동생이 5·18보상금으로 받은 4천만원 중 2천만원은 나한테 주고, 나머지 돈은 자녀를 입양한 가족에게 모두 전달했다”고 기억했다.
정씨는 늦은 나이에 중학교 야간반을 다니는 등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수감 기록 때문에 실패하고 건설업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게 주변인들의 설명이다.
친구 김석호(59)씨는 “정씨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 등 의리가 있었다. 정의감 때문에 5·18에 참여했지만 평생 힘들게 살았다”고 말했다.
정씨는 친구들에게 “삶이 힘들다. 내가 혼자 살아서 뭐 하겠냐”는 말을 하는 등 평소 삶에 미련이 없는 모습을 자주 내비쳤다. 최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형사보상금 2천만원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돈을 형편이 어려운 다른 5·18유공자들에게 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6월에는 남은 형사보상금으로 서울, 부산, 대전 등 전국 일주를 한 뒤 “처음으로 세상 사는 느낌을 받았다”고 친구에게 말하기도 했다.
정씨는 빈소도 차려지지 않은 채 홀로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될 뻔했으나 뒤늦게 5·18단체 등이 나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