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장재성 선생(왼쪽)과 서거 70주년을 맞아 제작된 기념 흉상. 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일제 강점기 시절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렀지만 한국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총살당한 고 장재성(1908∼1950) 선생을 기리는 행사가 장 선생 모교에서 열렸다.
장재성선생기념사업회와 광주서중·일고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30일 장재성 선생 서거 70주년과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 개교 100주년을 맞아 광주일고 역사관에서 장 선생의 동상 제막식을 열었다.
올해 5월 창립한 장재성기념사업회는 장 선생의 모교인 광주일고(옛 광주고등보통학교) 개교 100주년에 맞춰 장 선생의 흉상을 제작해 이날 공개했다. 올해 7월부터 4개월 동안 한갑수 조각가가 제작한 흉상은 높이 1m50㎝ 규모(기단부 포함)로, 광주일고 역사관 입구에 자리 잡았다. 흉상은 장 선생이 두루마기를 입은 채 입술은 굳게 다물고 두 눈은 먼 곳을 주시하는 모습으로 제작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도했던 강직함을 표현했다.
이날 흉상 제막식에는 장 선생 손자인 윤영(49)씨, 헌영(47)씨가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공식 석상에 장 선생의 유족이 나선 것은 처음이다. 윤영씨는 “할아버지의 옛 사진과 흉상이 똑같이 제작돼 아버지도 만족하신다. 흉상을 제작해주신 동문과 광주시민들에게 감사하다. 앞으로 할아버지의 정신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30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고 장재성 선생의 흉상 앞에서 장 선생의 후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기념사업회는 이날 흉상 제막식과 함께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61명의 서훈신청서를 광주지방보훈처에 전달했다. 앞서 기념사업회는 올해 6월에도 73명의 서훈을 1차 신청했었다.
유미정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장 선생님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념 문제로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신다. 이번 흉상 제막식을 계기로 장 선생님의 정신이 널리 알려져 모두 서훈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재성 선생은 광주고보 5학년 때인 1926년 11월 ‘성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사회주의를 연구하며 훗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원동력을 만들었다. 1929년 10월30일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양국 학생 간 싸움이 일어나자 한국인 학생에게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도록 움직였다. 이 때문에 양국 학생 간 싸움은 일제 항거로 발전될 수 있었다. 같은해 11월13일 일제 경찰에 붙잡힌 장 선생은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최고형량인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해방 정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지냈고, 남북 분단에 반대해 세차례 북을 오갔다는 이유로 1948년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장재성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 대상자에 장재성을 포함했다가 ‘해방 후 조선공산당 가입’을 이유로 서훈을 취소했다.
한편 이날 기념식에서는 독립운동,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에 헌신했지만 졸업하지 못한 동문 177명의 명예졸업장 수여식이 열렸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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