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전국 호남

“이주노동자에게 비닐하우스를 ‘집’이라 말하지 말라’

등록 2021-03-31 16:26수정 2021-04-01 02:34

지난해 12월 경기 포천의 캄보디아 노동자 사망 뒤에도 화재 등 잇따라
정부 실태조사, 지난해 농어업 이주노동자 69.6% 비닐하우스 등에 거주
전남 나주시 금천면 농공단지 미나리재배 농장 옆에 비닐하우스로 된 외국인 노동자 숙소가 자리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전남 나주시 금천면 농공단지 미나리재배 농장 옆에 비닐하우스로 된 외국인 노동자 숙소가 자리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31일 오후 찾은 전남 나주시 금천면의 한 미나리농장. 외국인 노동자들이 머무는 숙소인 비닐하우스가 눈에 띄였다. 이곳에는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 10명이 살고 있다.

이들의 숙소는 45㎡와 80㎡ 규모 비닐하우스 2개로 돼 있었다. ‘일터’인 미나리 비닐하우스와는 10여m 떨어졌다. 비닐하우스 숙소 안에는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침실, 조리실, 욕실 등이 자리했다. 식당은 따로 없었고, 비닐하우스 한켠에 4인용 식탁 2개가 놓여 있었다. 식탁이 놓인 바닥은 오랫동안 청소를 안 한 듯 흙먼지가 일었다. 식탁 옆 냉장고 옆면은 얼룩 때가 묻었다. 식당 안 조리대에 덮인 색바랜 장판은 곳곳이 찢어진 채 흙먼지가 쌓였다. 세탁기가 있는 욕실은 누런 물때가 벽면을 타고 올랐다. 시멘트 바닥은 깨졌다.

노동자들이 작업할 때 이용하는 야외 화장실은 문이 떨어져 나가 겨우 비닐로 내부를 가렸는데, 오랫동안 분뇨를 치우지 않은 듯했다. 미나리를 재배할 때 쓰이는 농업용수는 숙소 바로 옆으로 흐르며 악취를 풍겼다.

이곳 주민들은 외국인들이 미나리농장에서 일하는 줄은 있었지만 숙소의 상황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주민 ㄱ씨는 “미나리농장 외국인숙소는 농공단지 한가운데에 있어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다.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모르니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할 수도 없고 우리도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남 나주시 금천면의 한 미나리농장 외국인 노동자 숙소 안쪽 모습.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전남 나주시 금천면의 한 미나리농장 외국인 노동자 숙소 안쪽 모습.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미나리농장 대표 ㄴ씨는 “노동자들이 작업장으로 편하게 갈 수 있게끔 농장 옆에 숙소를 지었다. 숙소가 열악하다는 점은 공감하고 있다. 최근 시민단체나 시청에서 개선하라는 요구가 있어 열흘 정도 남은 미나리재배 작업이 끝나면 시가지 아파트를 숙소로 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동인권단체들은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두고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라며 주장했다. 화재·홍수·폭염·혹한 등 각종 재해에 취약한 비닐하우스에 대한 문제제기는 2020년 8월2일 기록적인 폭우로 경기 이천의 산양저수지 둑이 터지면서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저수지 붕괴로 대피한 이재민 173명 가운데 68.2%인 118명이 비닐하우스 등 가설 건축물에 거주하던 이주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부랴부랴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제공하면 고용허가를 내주지 않겠다는 대책을 내놨지만, 비닐하우스 안에 가설한 조립패널이나 컨테이너에서 여전히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전남 나주시 금천면의 한 미나리농장 비닐하우스 외국인 노동자 숙소.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전남 나주시 금천면의 한 미나리농장 비닐하우스 외국인 노동자 숙소.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지난해 12월20일에는 경기 포천의 한 채소농장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출신 20대 여성 노동자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다음달 따뜻한 고향 나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까지 사 두었지만 마지막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에도 비닐하우스 안은 고장 난 난방기가 며칠째 가동하지 못해 한데나 다름없었다.

지난 17일 밤에도 광주 북구 한 화훼농장의 비닐하우스 기숙사 안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안에 있던 캄보디아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12명이 황급히 대피했지만 여권을 비롯한 현금 침구 의류 신발 등은 모두 불타 사라졌다. 이들은 은 잿더미로 변한 숙소 앞에서 대형 인명 피해로 이어질 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노동인권단체들은 피해를 본 노동자들한테 의류 식품 등을 전달하고, 내외국인 차별 없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며 행동에 나섰다. 광주외국인노동자센터와 전남노동권익센터 등 단체 12곳으로 꾸려진 ‘광주전남 이주노동자 인권네트워크’는 31일 목포고용노동지청 앞에서 기자회견 열고 “이주노동자의 주거환경을 전수 조사하고 적절한 주거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정부가 2018년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제공하지 말라는 지침을 마련했지만 여태껏 농어가의 열악한 사정을 핑계로 비닐하우스 안 조립패널이나 컨테이너는 인정해 왔다. 준비가 필요하다며 이행기간을 9월까지 연장하고, 숙소를 신축하면 내년 3월까지 유예하기도 해서 위태롭기 짝이 없다” 고 강조했다.

현행 근로기준법 시행령은 비닐하우스를 노동자에게 숙소로 제공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도 외국인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1월부터 농·어업 사업장의 비닐하우스 안 가설건축물 등을 숙소로 제공하면 고용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했다. 또 사업자가 숙소 개선을 약속하고, 이주노동자가 동의할 경우 3월부터 6개월 동안 적용을 유예했다.

정부가 지난해 9~11월 농·어업 분야 외국인 노동자 3850명을 대상으로 주거환경 실태를 조사했더니 99.8%가 사업주가 제공하는 숙소를 이용하고 있었고, 조립패널, 컨테이너, 비닐하우스 안 가설 건축물인 경우가 69.6%에 이르렀다. 응답자 대부분은 냉·난방과 화장실, 채광과 환기 등 기본적인 생활여건은 갖췄다고 했지만 7.7%는 침실 잠금과 소방시설이 없다고 답변했다.

앞서 이주와 인권연구소가 2018년 이주노동자 1018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도 농·어업 분야의 주거환경이 다른 분야에 견줘 훨씬 열악했다. 이들은 사업장이 주로 고립된 지역에 있어 98.4%가 선택의 여지 없이 사업주가 제공하는 숙소에서 1인당 20만~40만원을 내고 생활한다고 응답했다. 숙소에 갖춰지지 않은 시설로는 에어컨(42.6%), 실내화장실(39.0%), 실내샤워실(34.1%), 방충망(23.1%), 침실 잠금장치(19.9%), 난방용 보일러(4.3%) 등을 꼽았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은 “농·어업 등 비전문분야 취업(E-9)비자로 들어온 합법 신분의 외국인노동자 10명 중 7명이 조립패널 컨테이너 비닐하우스 등에 살고 있다. 비닐하우스 등은 주거지가 아닌 만큼 유예 시한을 앞당기고, 자치단체와 노동당국이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고 말했다. 윤영대 광주전남 이주노동자 인권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농어촌에 외딴 섬이나 감옥 같은 비닐하우스들이 적지 않다. 지역사회의 농·수협, 면사무소가 나서서 빈집을 개축해 숙소로 활용하고, 나라별 거주지를 따로 조성하는 등 구실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희 안관옥 기자 kimyh@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전국 많이 보는 기사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1.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2.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3.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4.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5.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