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삼 제주시장이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큰아버지의 위패를 찾고 있다. 제주시 제공
“아버님은 백부모의 이름이 적힌 조그마한 위령비를 세우려고 몇날 며칠을 고심하셨습니다. 비석의 뒷면에 무엇인가를 적어야 하는데 몇번씩 고쳐서 자식들과 상의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나중에는 딱 한줄만 적었어요. ‘4·3 때 행방불명되어 이 비를 세우다’였습니다.”
강병삼 제주시장은 30일 오전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4·3 희생자인 큰아버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강 시장은 전날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재판에 유족 신분으로 참석했다.
강 시장의 큰아버지(강재현)는 중산간 마을인 애월면 상귀리에서 어머니, 아내, 동생 등 다섯 식구와 함께 살며 농사를 짓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초토화가 진행된 1948년 11월 이후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에게 해안 마을로 내려가도록 소개령을 내린 뒤 마을에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산간으로 피신하기도 했고, 해안가의 친인척들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산으로 피신한 뒤 가족과 헤어진 큰아버지는 1949년 3월께 경찰이 “지서에 나오면 사면해준다”는 말에 스스로 지서를 찾아갔다. 큰아버지는 같은 해 7월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첫번째, 마포형무소에서 두번째 엽서를 집으로 보낸 큰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행방불명됐다.
강 시장은 “2012년 3월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아버지를 찾아갔더니 ‘착하다’는 칭찬이 전부였어요. 그리고는 ‘네가 공부하는 동안 신경 쓰일까 봐 하지 못한 게 있다. 하루만 시간을 내라’며 백부모 비석 이야기를 꺼내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비석을 세운 날, 술을 마셨다. “어머니가 술을 더 드시지 말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오늘은 마셔도 된다’며 엄청 마셨어요. 나 ‘이제 숙제 다 했다’고 하면서요. 그날의 일은 우리 형제들에게도 ‘아버지가 60년 넘게 형님을 생각하며 사셨구나. 우리들은 그렇게 하고 있나’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날 오후 제주지방법원 형사4-2부(재판장 강건)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이 청구한 군사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30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금까지 37차례에 걸쳐 직권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된 4·3 군법회의 피해자는 모두 1061명이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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