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제주공항 유해발굴 과정에서 259구의 4·3 희생자 유해가 발굴됐다. 사진은 4·3 당시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허호준 기자
지난달 22일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4·3연구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개토제가 열렸다. 간단한 의식으로 시작된 올해 4·3 유해발굴 사업은 올해 말까지 계속된다. 이번 조사는 유해발굴 사업을 했음에도 여전히 수습하지 못한 유해와 희생자들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분묘들이 있다는 제보가 제주4·3평화재단과 4·3연구소 등에 이어지면서 이뤄진 것이다.
4·3 유해발굴은 행방불명된 희생자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4·3 진실 규명을 하는 데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이다. 유해발굴 사업은 2003년 정부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하면서 채택한 7대 대정부 건의안 가운데 ‘집단 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 지원사업’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4·3연구소 등은 발굴 작업을 통해 그동안 제주국제공항 등 제주도 내 곳곳에 있던 4·3 희생자 유해를 찾아냈다.
4·3연구소가 2007~2008년 수행한 제주공항 4·3 유해발굴은 기적적이었다. 4·3 유족들과 연구자들은 4·3 당시 일상적인 학살터였던 제주공항 유해발굴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해왔지만, 국가 보안시설이라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때마침 사용하지 않던 남북활주로 정비공사를 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여러 기관과 정치권이 협조하면서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가능하게 됐다. 4·3 영령들의 도움이 있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눈앞에 부모·형제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항공기의 굉음 속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불효, 불경의 후손들에게 제주공항은 회한의 땅이요 금기의 영역이었다. 4·3 장편소설 <화산도>의 저자인 재일소설가 김석범은 제주공항에 내릴 때마다 공항 땅속에 묻혀 있는 유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4·3 유족들의 많은 관심 속에 2007년 8월, 제주공항에서 1차 유해발굴 사업이 시작돼 연말까지 이어졌다. 1차 발굴 당시 1만㎡가 넘는 넓은 땅을 빈틈없이 파고들어 가면서 확인해 나가는 작업을 먼저 했다. 활주로의 뜨거운 열기도 4·3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이들의 열기를 꺾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맨 먼저 굴착했던 곳에서 암매장 구덩이가 확인됐다. 2008년 9월부터 1년 남짓 이어진 2차 발굴에서도 암매장 지점을 확인했다. 공항의 흙을 걷어낸 뒤 나온 4·3 유해들은 처참했다. 뒤로 팔이 묶인 주검들이 있는가 하면, 머리뼈가 으스러진 경우도 있었다. 곳곳에 총탄도 있었다. 주검들은 아무렇게나 내던져 암매장됐다. 4·3은 처참한 모습으로 6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주공항에서 발굴된 유해를 2009년 3월 유전자 감식을 위해 제주대학교 의대로 운구했다. 허호준 기자
2차 발굴 때는 굴착 초기 현장 발굴을 책임진 고고학자가 250구의 유해를 안고 나오는 꿈을 꿨다고 했다. 이 꿈은 현실로 나타났다. 발굴에서 나온 유해 수와 꿈속의 유해 수가 거의 일치하는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발굴자들은 예비검속과 군사재판 탓에 희생된 할아버지, 아버지의 형제, 삼촌들을 60년 만에 양지로 모시게 돼 후손 된 도리를 조금이라도 한 듯했다.
앞서 4·3 유해발굴은 11구의 유해가 발견돼 4·3의 비극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한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 유해발굴이 단초가 됐다. 그러나 이들 유해는 발굴된 지 45일 만에 한 줌의 재로 변해 바다에 뿌려졌다. 백조일손유족회는 2000년 9월21일부터 2001년 2월20일까지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6·25전쟁 시기 예비검속자 학살 때 암매장된 유해 발굴작업을 벌여 치아와 의류, 실탄 등을 수습했다. 2003년 9월16일, 남원읍 중산간마을 희생 주민들의 의귀리 ‘현의합장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는 3개의 봉분에서 39구의 유해가 확인됐다.
유해발굴 사업은 4·3특별법으로 뒷받침된다. 2003년 건의안에는 정부가 “집단 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 사업을 지원하되 유해 발굴 절차는 희생자와 가족의 존엄성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해 시행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또 2006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4·3특별법 개정 법률이 2007년 1월24일 공포됨에 따라 4·3위원회의 심의·의결사항 가운데 하나로 ‘집단학살지, 암매장지 조사 및 유골의 발굴·수습 등에 관한 사항’이 추가됐다.
제주공항에서 발굴된 유해에 대한 신원 확인 결과 신원이 확인된 유해들을 제주4·3평화공원 내 유해봉안실에 안치하는 봉안식이 2018년 11월22일 열렸다. 허호준 기자
4·3 유해발굴 사업은 2006년 5월 ‘긴급 구제발굴’로 화북천 옆 밭에서 유해를 발굴하면서 탄력을 받았다. 제주도는 2006년 10월31일 제주대학교, 제주4·3연구소와 협약을 맺어 2008년까지 화북동 일대 5개 지역과 제주공항을 대상으로 유해발굴 사업을 추진했다. 이어 4·3평화재단이 설립된 뒤에는 4·3평화재단이 유해발굴 사업을 주도했다. 4·3평화재단은 2018년 제주공항과 도두동 등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동안의 발굴 결과 모두 405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4·3 희생자 유해발굴은 희생자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4·3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다. 또 발굴된 유해의 신원 확인을 위한 유가족 채혈은 지난 수십년 세월 동안 희생자의 유해를 거두지 못해 응어리진 유족의 한을 풀 기회다. 해당 암매장지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이 추진한 유전자 감식 결과, 2006년부터 2019년까지 발굴한 405구의 4·3 희생자 유해 가운데 133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이는 6·25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자 유해발굴을 통해 신원을 확인한 첫 사례이다.
4·3 유해발굴 사업은 아직도 불분명한 행방불명 희생자들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가 밀도 있게 체계적으로 지속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500명에 가까운 제주도 북부지역 예비검속 희생자들의 유해는 여전히 공항 발굴에서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제주도는 4·3평화재단에 유해발굴 사업을 의뢰해서 제주도 내에 산재한 중소규모 유해 암매장지를 발굴하고 있다.
지난달 31일에는 가시리 과수원에서 유족을 알 길 없는 3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4·3은 아직도 미완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앞으로 제2기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전국 각 지역의 암매장지 유해발굴을 조속히 추진하기를 기대한다. 진정 한반도와 제주섬 땅 위에 따뜻한 봄빛이 비치기를 염원해본다.
박찬식 제주4·3평화재단 유해발굴사업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