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중구의 보수동 책방골목에 세워진 아테네 학당 건물. 김영동 기자
“저리 큰 책이 여 있는 거 보면 참 신기하지예?”
지난 25일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마주친 박정은(69)씨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헌책방거리 가운데쯤에 높이 16m의 책 5권이 책장에 꽂힌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책들을 살피자 사원소설(흙, 공기, 물, 불)로 우주를 설명하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서양 윤리학의 토대가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이 눈에 들어왔다.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거장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각각 들고 있던 책이다. 가까이 가보니, 책을 형상화한 건물이다.
사람들 눈을 단숨에 사로잡는 이 건물의 이름도 ‘아테네 학당’. 건물에 들어가면, 켜켜이 쌓인 책들이 가득 찬 책방이 나온다. 책방골목에서도 규모가 크고 보유 서적이 10만권 이상으로 알려진 책방 3곳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애초부터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꼽는 책방이다. 이곳에서 36년 동안 책방을 운영하는 문옥희 우리글방 대표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하는 건물이다. 다 지어지지 않았는데도 방문객이 적잖다. 책방골목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부산 중구의 보수동 책방골목에 세워진 아테네 학당 건물 천장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벽화가 재현된 모습. 김영동 기자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이들 책방은 입주 건물이 건설업체에 팔리면서 가게를 비워줄 형편에 놓였다. 건설업체가 건물을 허물고 고층 오피스텔을 짓는다는 소문이 돌면서 난리가 났다. 책방골목의 정체성이 흔들릴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지자체인 중구도 뾰족수를 찾지 못했다. 실제 소문의 주인공 ㅋ업체는 애초 15층짜리 54개실 규모의 오피스텔을 지으려 했다. 김대권 업체 대표는 “사정을 잘 모르고 건물을 매입한 뒤, 상인들과 시민들이 책방골목 쇠락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목소리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수익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책방골목 되살리기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방골목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에 건물 외관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그림에 등장한 책 모양으로 리모델링했다. 건물 내부 천장에는 아테네 학당 벽화를 재현했다. 김 대표가 직접 화가들을 섭외했다. 현재 건물은 1층 내부 공사 마무리 단계다. 1층에는 책방, 2~3층은 카페, 4층은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자금 사정이 녹록지 않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산 역사·문화적 가치 보존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뿌듯합니다.” 김 대표의 말이다.
중구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한겨레>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책방골목의 정체성과 인식을 더 널리 알렸다. 준공도 되기 전에 입소문이 많이 퍼지고 있어 책방골목 되살리기에 기폭제 구실을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행정 절차 등 도울 수 있는 부분은 구청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책방골목은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각종 헌책 등을 팔면서 형성됐다. 교과서와 참고서가 드물었던 1970~80년대 100곳이 넘는 책방이 들어서며 헌책방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고서 등 문헌 가치가 높은 책도 이곳에 몰렸으나 2000년대 이후 책 찾는 사람들이 줄고 기업형 중고서점 등이 등장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30여곳의 책방만 남아 있다. 부산시는 2019년에 책방골목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