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을 모르던 울산 동구, 위기가 현실이 되다
서울에서 울산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울산 동구는 초행이었다. 4월23일 그 길에 나서면서 무엇을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공장이 떠난 도시-울산 동구 편’을 준비한다고 말했더니 울산 동구청 일자리 정책 부서의 한 공무원이 되물었다. 현대중공업이 아직 남아 있지 않냐고. 공장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고. 애써 희망을 찾으려는 흔적이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39년 동안 장사했다는 식당 주인도, 정규직 노동자 전환을 꿈꾸며 동구로 왔다는 하청 노동자도, 저마다 표현은 달랐지만 비슷하게 반응했다. 울산 동구 사람들은 객관적이 될 수 없었다. 바깥에서 어떻게 보든 조선 산업이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2015년 1월 시작된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뒤흔들었다. 위기는 빠르게 46년간 세워 올린 산업도시의 질서를, 돌이킬 수 없도록 무너뜨렸다. 현대중공업 구조조정 뒤 조선소에서는 배도, 사람도 사라져갔다. 주요 언론은 인적이 끊긴 주택가와 식당, 술집에 대한 르포르타주(현지 보고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놓으며 울산 동구의 경기침체와 산업도시의 운명을 이야기했다. 한순간에 오랜 질서가 깨지고 삶의 형태가 바뀐 산업도시의 현재와 미래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기에는 틀에 박힌 조각의 기록들이었다.
<한겨레21>은 ‘공장이 떠난 도시-군산 편’(제1269호)에 이어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에서 일했던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과 이웃한 이들이 구조조정 뒤 겪은 변화상과 충격파를 찬찬히 다시 되짚어봤다. 이 이야기는 조선소 노동자들과 울산 동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기반산업이 깊은 불황에 빠진 한국의 수많은 제조업 도시와 그곳에 뿌리박은 노동자와 그 가족, 자영업자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지난 4~5월 약 6주 동안 <한겨레21>은 울산 동구 한복판에 있었다. 동구에 사는 37명을 만났다.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들, 그들의 배우자, 자영업자들과 이야기했다. 그들 가운데 15명을 무대 위에 올렸다.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이 거둔 성취와 좌절의 기억을 더듬어 A4용지 190쪽 분량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재구성했다.
글은 4개 장으로 엮었다. 첫 장은 위기의 시작이다.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중산층에 속했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계층 사다리 아래쪽으로 밀려나면서 벌어진 이야기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장은 연달아 추락한 하청 노동자와 그 가족, 자영업자의 기억이다. 마지막 장에는 현대중공업 본사의 서울 이전이라는 또 다른 얼굴로 찾아온 위기에 산업도시의 정체성을 묻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울산 동구로 들어가는 길 가운데 하나인 울산대교에서 시작한다. 기사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글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만화 이윤희, 인포그래픽 디자인주
*목차
① 도로 신입: 불황을 모르던 울산 동구, 위기가 현실이 되다
② 개꿈: 처음부터 정규직과 하청이 꾸는 꿈은 달랐다
③ 동구 아줌마의 구직: 밀린 관리비 경고장이 아파트마다 나붙었다
④ 공장만 남은 도시: 현대중공업은 2개 회사로 쪼개져...
② 개꿈: 처음부터 정규직과 하청이 꾸는 꿈은 달랐다
③ 동구 아줌마의 구직: 밀린 관리비 경고장이 아파트마다 나붙었다
④ 공장만 남은 도시: 현대중공업은 2개 회사로 쪼개져...
울산대교를 지나 현대중공업이 들어선 산업도시 울산 동구로 들어갔다. 울산 사람들은 동구를 ‘섬 아닌 섬’이라 했다.
프롤로그
‘끽!’ 울산대교를 달리던 택시 한 대가 난데없이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황강민(49)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택시의 뒷좌석 문이 열렸다가 도로 닫혔다. 다리 한가운데쯤에서 택시는 또다시 멈춰 섰다. ‘끽!’ 별안간 뒷좌석에 타고 있던 남자 승객이 나오더니 다리 난간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이었다. 택시 운전사도 쫓아나왔다. 황강민도 자신의 자동차 K5를 길가에 세우고 달려나갔다.
황강민은 남자의 팔과 어깨를 부여잡았다. “놔라. 내비도라!” 거칠게 빠져나가려는 남자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잡지 마라, 더러운 세상 몬 살겠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남자는 완강했다. 황강민과 택시 운전사는 그의 바람막이 잠바와 배낭을 붙잡고 늘어졌다. 바람이 거칠었다. 잠바 한쪽을 놓치자 잠바가 황강민을 세차게 때렸다.
어디선가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달려나왔다. 다리를 관리하던 민간 업체 직원들이었다. 한 직원이 다리 난간 밖으로 넘어가 남자를 끌어안았다. 둘 다 난간 밖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황강민은 112와 119에 신고했다. 다리 밑에 해양경찰들이 도착했다. 소방차와 경찰차도 뒤따랐다. 밧줄로 남자를 묶어 난간에 고정하자 잠잠해졌다. 경찰은 남자를 경찰차에 태웠다. 황강민은 다리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봤다. 어지러웠다.
황강민이 남자를 구한 2018년 한 해에만 울산대교에서 열 사람이 떨어졌다. 울산대교는 2015년 6월 개통했다. 같은 해 1월 현대중공업은 첫 번째 위기 신호를 보냈다. 1500명을 내보내는 희망퇴직이 시작됐다. 울산대교 개통 뒤 불과 5년도 안 된 사이 14명이 몸을 던졌다. 울산대교 저편 울산 동구의 10만 명당 자살률은 33.3명(2017년)으로 2년 새 11.6명이나 급증했다.
울산대교를 지나 10분 정도 내달리면 주택 밀집 지구가 다가온다. 그리고 스웨덴 말뫼조선소에서 ‘1달러’에 들여온 붉은색의 골리앗 크레인이, 선박이, 조선소가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산업도시가 펼쳐진다. 울산 동구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동남쪽은 동해와 닿아 있고 북서쪽은 산지로 둘러싸였다. 울산 사람들은 동구를 ‘섬 아닌 섬’으로 여겼다. 울산대교 개통 전만 해도 울산 동구로 가려면 현대자동차가 만든 ‘아산로’ 도로를 달려 20분쯤 에둘러 가야 했다. 아산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호다.
울산 동구 해변을 둘러싸고 들어선 조선소 울타리 안에서 산업도시의 시가지는 남북으로 길게 만들어졌다. 1997년 울산 동구의 유일한 백화점인 현대백화점이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편에 문을 열었다. 1980년대부터 사원 아파트 단지들이 조선소 주변에 생겨났다. 1990년대 현대중공업이 지은 문화시설들은 조선소 노동자 자녀들의 놀이터가 됐다. 울산 동구의 골목에는 ‘현대’ 식당만 최근까지 130여 개가 있었다. 40년 넘게 조선소는 노동을 넘어서 울산 동구의 생활리듬을 규율해왔다.
하지만 2015년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이 시작된 뒤 4년에 걸쳐 조선소 노동자와 가족들은 예견할 수 없었던 경제적 재난 앞에서 급격한 삶의 추락과 생활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조선소가 지탱해온 울산 동구는 위기가 닥치자 남성 위주의 일자리, 원청과 하청 업체 사이의 불평등 등 가려져 있던 오랜 제조업 기반 도시의 모순도 드러냈다. 변화와 모순, 좌절에도 울산 동구의 삶들은 다시 꿈틀거린다.
현대중공업 정문 뒤편 건물에 적힌 표어,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는 공허한 이야기가 됐다.
울산 동구 사람들은 예견할 수 없었던 경제적 재난 앞에서 급격한 삶의 추락을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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