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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재 끝낸 첫 민중항쟁, 40년째 기념관 하나 없다

등록 2019-10-16 04:59수정 2019-10-16 07:31

[부마민주항쟁 40돌-그날의 기억]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 그은 사건
박정희 심장 겨눈 김재규 중정 부장도
“부마사태 발포명령 운운해 저격” 진술
심의위원회 6년째 진상규명 지지부진해
강제 조사권 없어 자료·진술확보 힘들어
피해 인정범위 협소해 신고자 적어 한계
부산 중구 광복동에서 시민·학생이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부산 중구 광복동에서 시민·학생이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탕! 탕!”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0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옆 궁정동 대통령 안전가옥(안가)에서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권력 서열 2위로 불렸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을 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친정부 성향의 대의원들이 대통령과 전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선출하고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리면서 중임제한을 폐지하는 이른바 유신헌법을 만들어 장기집권을 꿈꾸었던 독재자의 18년 철권통치가 끝난 것이다.

중앙정보부 수장인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심장을 왜 겨눴을까. 많은 분석과 견해가 나오는 가운데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총소리가 나기 열흘 전 발생했던 부마민주항쟁이 10·26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주장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근거는 김재규의 형사재판 기록이다. 1979년 12월8일 비공개로 열린 1심 2차 공판에서 그는 “계엄이 선포된 부산에 내려갔다가 본 것을 각하에게 보고했는데 각하께서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말기에는 최인규와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다.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는데 누가 나를 총살하겠느냐’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10월16일 부산대 학생들이 시작한 거리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도한 김재규가 박 대통령한테 온건한 대책을 세우라고 했는데 박 대통령이 강경 대응을 하겠다고 하자 저격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형사재판 기록을 추적한 부산 법무법인 민심의 변영철 대표변호사는 “재판 기록을 보면 김재규는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박 대통령 살해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중 부마민주항쟁을 직접 목격하고 박 대통령에게 전향적 변화를 건의했는데 이마저 묵살당하자 실행에 옮겼다”고 평가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 옛 부산시청(부산 중구 광복동) 앞에서 탱크가 감시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계엄령이 선포된 뒤 옛 부산시청(부산 중구 광복동) 앞에서 탱크가 감시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부마민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이 없었다면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두달여 뒤 신군부의 12·12쿠데타도, 1980년 5·18민주항쟁도, 1987년 6·10민주항쟁도 없었다. 부마민주항쟁은 1960년 4·19혁명과 5·18민주항쟁,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반독재 민주항쟁의 계보를 잇는 항쟁이었다.

부마민주항쟁 이전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학생과 재야인사 중심이었다면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한 최초의 시민항쟁이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찰과 계엄군에 검거된 이들 가운데 학생(27%)보다 일반인(73%)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부마민주항쟁은 긴급조치 때문에 숨죽였던 전국 대학가에 불을 댕겼다. 10월25일 대구 계명대생 600여명이 유신 철폐 등을 외치며 교내 시위를 벌였다. 비슷한 시기 서울대, 연세대, 공주사범대 학생들은 ‘부마사태 구속자 즉각 석방’ 등을 요구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런 사실은 박 대통령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마민주항쟁이 전국 항쟁으로 번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부마민주항쟁이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섰다면 5·18민주항쟁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5·18민주항쟁을 닮은 부마민주항쟁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5·18민주항쟁은 1997년에, 6·10민주항쟁은 2007년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지만 이보다 앞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은 40년이 지난 올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뒤늦게 국가기념일 지정이라는 큰 산을 넘었지만 진상 규명과 피해자 보상 등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제정되고 2014년 10월 심의·의결기구인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꾸려졌으나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경찰과 계엄군이 시위 현장에서 검거한 사람은 1564명에 이르렀지만 현재 심의위원회에 피해자라고 신고된 건수는 지난 5일 기준 289건에 불과하고 심의위원회를 거쳐 피해자라고 인정된 사람은 208명에 불과하다. 최소 이틀 이상 경찰서 등에 불법구금됐던 1000명 이상이 피해자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3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올해 9월 경남 마산(현 창원시)의 유치준(당시 51살)씨만 공식 사망자로 인정됐다. 나머지 2명은 이름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 신고가 적은 것은 심의위원회의 기능과 권한 등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심의위원회는 조사관이 5명에 불과한데다 그마저도 오는 12월에 활동이 종료된다. 조사기간을 2년 더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국회는 1년으로 못 박았다. 조사관들이 당시 군경 관계자들을 만나려거나 군과 경찰에 자료를 요청하면 거부하기 일쑤다. 강제 조사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주영·최인호 의원 등이 조사기간 연장과 동행명령권 등을 담은 법률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차성환 심의위원은 “박근혜 정부가 대선 공약 때문에 부마항쟁보상법을 만들었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지지부진하다. 지금이라도 활동기한을 연장하고 실질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정치권이 협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의 신고를 늘리려면 보상금 지원 대상을 확대할 필요성도 있어 보인다. 보상금은 생활지원금과 의료지원금 등으로 나뉘는데 생활지원금 지급 대상은 구금일수 30일 이상으로 한도액은 5000만원이다. 피해자 1564명 가운데 구속된 121명만 생활지원금을 받고 구금일수가 30일 미만인 나머지 피해자는 생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5·18민주항쟁 피해자들은 하루만 구금돼도 보상하는 것과 비교된다.

민법을 적용하고 있는 국가의 손해배상 소멸시효도 문제다. 민법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경우 피해자나 법정 대리인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동안 행사하지 않거나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 지나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를 적용하면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의 소멸시효는 1989년 10월이다.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이 1989년 10월까지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았다면 국가의 손해배상 의무는 사라진다. 문제는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진실을 조작하거나 은폐하면 오랜 기간 진실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3년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을 언제로 삼을 것인가가 쟁점인데 재판부마다 엇갈린다.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는 재판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을 인정한 2010년 5월을, 손해배상청구를 인용하는 재판부는 심의위원회에서 피해자로 인정받은 날을 각각 기준으로 삼는다.

부마민주항쟁을 재조명하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조처도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79년 10월16일 부산대 교내 시위를 처음 주도한 정광민씨는 “3·15의거와 5·18민주화운동 기념관은 있지만 부마민주항쟁기념관은 없다. 부마항쟁기념관을 만들어 독재 폭압에 맞선 부마민주항쟁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영배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사무처장은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처럼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도 유공자 대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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