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부항 이스턴도클랜드역. 항만철도를 철거한 땅에 건물들을 세우면서 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줄지어 배치해서 달리는 기차를 형상화했다. 최상원 기자
“이 지역이 예전에 항구였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워요. 항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젠 별로 없고요. 옛 항구에 건설된 완전히 새로운 도시일 뿐이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부항의 이스턴도클랜드 관리자인 쉬자너 피서르스는 “동부항은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고 잘라 말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고 있는 암스테르담 동부항 재개발 사업은 항만 재개발의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하지만 에이강을 매립해서 조성한 이스턴도클랜드 구역과 오스테르독 구역으로 이뤄진 암스테르담 동부항 재개발 사업지와 동부항 인근에 건설한 인공섬인 에이뷔르흐 구역의 개발 사업지까지 지난 17~21일 방문해 샅샅이 살펴봤으나, 기존 시가지와는 완전히 다른 신도시가 펼쳐져 있을 뿐 항만시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직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2~4층의 개인주택과 5~10층의 아파트가 줄지어 있었다. 고층 아파트는 어쩌다 눈에 띌 정도로 드물었다. 개인주택 앞뒤에는 정원이 있었고, 정원 없는 주택 바로 앞에는 운하가 있고 요트가 매여 있었다. 아파트는 단지를 이루지 않고 ㄷ자 형태로 1개 동씩 있고, ㄷ자 사이 넓은 공간에는 공동 정원이 있었다. 모든 구역은 수변공간에 둘러싸여 있는데, 수변공간으로 다가갈수록 건물 높이가 낮아져 조망권을 보장했다.
암스테르담시는 동부항을 압축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정원 없는 주택에 대해서는 수변공간을 정원으로 인정해줬다. 최상원 기자
암스테르담 동부항은 16세기부터 항만교통 중심지로 발달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일반 화물선을 처리하도록 설계돼, 자동화·대형화를 요구하는 현대 항구의 요건을 따라가지 못했다. 항만은 1950년대 들어 급속히 쇠락했고, 1979년을 마지막으로 300톤 이상 대형 화물선의 운항이 끊겼다. 항만 관련 기업과 시설은 서부항 등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거나 문을 닫았다. 1980년대 들어 빈 건물들을 점거운동가, 예술가, 히피 등이 차지했다.
암스테르담시는 1970년대 초부터 동부항 항만 기능을 살리는 재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1985년 항만 기능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 주거·일자리·여가·교육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압축도시(compact city)를 건설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복합용도의 고밀도 개발을 통해,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려는 정책이었다.
1970년대 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부항 이스턴도클랜드 모습. 이미 이때 동부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시 제공
암스테르담시는 꾸준한 협의를 통해 건물 점거운동가들로부터도 재개발 동의를 받아냈다. 이들은 동부항의 상징적 건물들을 철거하지 않고 보존해달라고 요구했다. 암스테르담시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방파제·선창 등 항만시설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재개발을 추진했다. 항구라는 장소성과 역사성을 지키면서 철거 비용을 줄이는 경제적 효과도 컸기 때문이다.
헤르트얀 니우엔하위전 암스테르담 항만청 운영책임자는 “항만 재개발은 항구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도시 전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항상 열린 대화, 광범위한 관점, 다양한 요구의 이해 등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이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는 최선의 도구는 반대 의견도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는 토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협의를 통해 보존된 대표적인 건물이 1980년부터 방치됐던 더즈베이허르 냉동창고다. 더즈베이허르는 ‘침묵자’라는 뜻으로, 네덜란드 건국의 아버지인 오라녀공 빌럼 1세의 별명이다. ‘오라녀’는 오렌지의 네덜란드식 표현인데, 오렌지색이 네덜란드 상징 색깔이 될 만큼 그는 지금도 네덜란드 국민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암스테르담시는 이스턴도클랜드 구역의 야바섬을 육지와 연결하기 위해 더즈베이허르 냉동창고를 철거하고 다리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건물 점거운동가들의 요구에 따라 지상 7층 건물인 냉동창고의 아래 3개 층에 구멍을 뚫고, 구멍 사이로 다리를 건설했다. 현재 이 건물은 공청회·강연·토론 등을 하는 공론장과 카페로 활용된다.
이스턴도클랜드의 항만철도를 철거한 땅에 들어선 건물들은 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줄지어 늘어서서, 달리는 기차를 형상화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시의 번화가인 중앙역에 인접한 오스테르독 구역에는 현대식 관광·상업시설과 공공도서관이 세워졌다. 많은 예술가들은 옛 조선소 창고 등을 개조해 공동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부항 이스턴도클랜드에 있는 더즈베이허르 냉동창고 건물. 암스테르담시는 이 건물을 보존하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지상 7층인 건물의 1층부터 3층까지 부분에 구멍을 뚫고 그 사이로 다리를 건설했다. 최상원 기자
30여년에 걸친 재개발 사업으로 오스테르독과 이스턴도클랜드는 이미 입주까지 완료됐고, 90년대 이후 조성한 인공섬 지역인 에이뷔르흐에서만 2030년 완공 목표로 건설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암스테르담시는 에이뷔르흐에 인공섬 2개를 추가 건설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에이뷔르흐를 제외한 오스테르독과 이스턴도클랜드 재개발지역의 면적은 육지 1.75㎢, 공유수면 2.15㎢ 등 3.90㎢에 이른다. 9월 말 현재 3개 구역의 인구는 3만2316가구 6만8897명에 이른다.
암스테르담 동부항에 건설된 ‘압축도시’는 1만㎡당 100채씩 집이 들어서서, 기존 도심지에 견줘 3배가량 촘촘하다. 암스테르담의 ‘에밀 라머르스 건축사무소’ 대표 에밀 라머르스는 “재개발지역에 새로운 집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암스테르담 시민들은 ‘저런 좁은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개발지역 그 어디를 살펴봐도 ‘압축도시’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한국은 왜 이런 쾌적한 환경의 신도시를 건설하지 못할까”라는 의문이 생길 뿐이었다. 파코 뷔니크 암스테르담시 도시설계책임자는 “한국에 가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왜 막대기처럼 생긴 아파트를 이렇게 많이 지었는지, 한국의 전문가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압축’에 대한 네덜란드와 한국의 기준은 전혀 다른 듯했다.
암스테르담 동부항 이스턴도클랜드의 건물. 재개발 이전부터 있었던 옛 건물을 허물지 않기 위해 옆부분 일부만 잘라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최상원 기자
대규모 항만 재개발을 통해 촘촘하면서도 쾌적한 신도시를 건설하는데도, 사비너 힘브레러 암스테르담시 국제협력국장은 “예산 확보는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에는 없는 제도인 ‘공공토지임대제’(Het Gemeentelijke Erfpachtsysteem) 덕택이다. 이 제도는 토지소유자의 노력과 관계없는 외부 요인으로 상승하는 토지가치를 공공기관이 환수하고, 이 돈으로 사유지를 사들여 토지사용권, 즉 지상권만 개인에게 분양하는 것이다. 암스테르담시는 1896년 이 제도를 도입해 120여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암스테르담 전체 땅의 85%가량을 소유하고 있다. 나머지 15%의 땅을 소유한 개인들은 암스테르담시의 토지이용 계획에 반드시 협조해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암스테르담시는 현재 토지 가치와 이주 비용만 치르고 합법적으로 그 땅을 수용할 수 있다.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개발이익은 땅값에 반영되지 않는다.
오스테르독과 이스턴도클랜드 구역의 재개발을 시작할 때 암스테르담시는 네덜란드철도청 땅을 제외한 이 지역 모든 땅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시는 네덜란드철도청 땅과 기존 건물들의 지상권을 10억유로(약 1조3000억원)에 사들였다. 기반시설 설치와 조경 공사에 8억유로(약 1조원)가 들어갔다. 이 돈은 공공은행에서 대출해서 마련했다. 이 과정에 일자리 감소를 막기 위해, 이주하는 업체와 협의해 이주할 지역·조건·기간 등을 조율하고 지원했다. 이주하는 기업체는 서부항 등 옮겨갈 곳에서 합리적 가격으로 토지사용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재개발 사업으로 암스테르담시가 확보한 토지사용권 분양 수입은 사업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았다. 남은 돈은 도시재생 특별기금으로 들어갔다. 공유수면에 새로 만든 인공섬인 에이뷔르흐 구역은 네덜란드 중앙정부로부터 매입해, 개발하고 있다.
동부항 재개발지역에 세워진 개인주택과 아파트의 60%는 지상권까지 암스테르담시나 주택조합이 가진 임대주택이다. 임대주택은 가격이 싼데다 위치도 좋아서 개인 소유 주택보다 인기가 높다. 임대주택을 받으려면 몇년씩 대기해야 하므로 대부분 청소년 때부터 신청한다.
네덜란드 델프트공대의 강빛나래 연구원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외에도 스웨덴 스톡홀름, 핀란드 헬싱키, 덴마크 코펜하겐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들이 공공토지임대제를 시행한다. 우리나라도 공공토지를 매각할 때 토지분양 수입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지상권 계약 방식으로 공공성을 지키는 기법을 실험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제안했다.
암스테르담/최상원 기자 cs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