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피폭 희생자 1천여명의 위패를 모신 경남 합천군 원폭피해자 위령각에서 청소년들이 참배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원자폭탄 피폭 후유증이 자손에게 대물림되는지를 밝히려는 연구가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원자폭탄 피폭자 자손이 희귀난치성 질환을 많이 앓는 이유가 피폭 후유증의 대물림 때문으로 밝혀진다면 외교적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5월 한양대 박보영(예방의학교실)·남진우(생명과학과) 교수 연구팀에 이 연구를 의뢰했다. 박 교수는 5일 경남 합천에서 열리는 ‘2020 합천비핵평화대회’에서 ‘피폭 1·2·3세대 코호트 구축 및 유전체 분석 연구’ 계획을 발표한다. 연구 결과는 2024년 말 나온다.
피폭자와 그 자손의 희귀난치성 질환 유병률이 높다는 것은 다양한 실태조사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은 피폭 후유증의 대물림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피폭자는 한국과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지만, 그 자손은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더라도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며 원폭 피해자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피폭 후유증이 대물림되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피해자 수는 엄청나게 늘어나고, 유전병을 치료하지 못하면 피해는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 원폭 피해자 단체들은 미국과 일본이 피폭 후유증의 대물림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박보영 교수는 “이번 연구는 방사능이 인체와 질병 발생에 미치는 영향의 인과성을 파악하고 유전체 분석을 통해 자녀 등에 미치는 유전적 영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원폭 피폭자와 그 자손의 생애·세대에 걸친 보건학적·의학적 관리 대책과 정책 수립의 근거를 제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는 원폭 피폭 1~3세대 27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사망자를 포함한 가계도 작성, 건강검진 등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가운데 400명에 대해선 유전체 분석도 할 예정이다. 첫해인 올해는 300명을 조사하고, 이 가운데 20가족 60명의 유전체 검사를 한다.
피폭자 2세들의 쉼터인 ‘합천 평화의 집’ 사무국장 한정순씨는 “연구를 시작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화부터 났다. 해방되고 8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피폭 1세대는 이미 대부분 사망했고, 후유증을 대물림받은 2세대도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정부에게 따지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당시 한국인은 7만여명이 피폭돼, 4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건진 3만여명은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이들 가운데 지난해 말 현재 생존자는 2100여명이며, 평균 나이는 81살이다.
피폭 후유증의 대물림 문제는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라는 난치병을 앓던 김형률씨가 2002년 3월22일 자신이 피폭 2세대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불거졌다. 김씨는 2005년 5월29일 35살의 나이로 숨졌다.
최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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