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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75세에 독서토론이라니, 괜히 흐뭇했다

등록 2021-07-02 05:00수정 2021-07-02 18:10

[김종광 소설] 시니어 독서토론

다 겪어 더는 겪을 일이 없다고 버릇처럼 생각한 게 오래전부터였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일이 샘솟았다. 앞으로도 처음 겪는 일이 수없을 테다. 75세에 독서토론이라니, 괜히 흐뭇했다.
일러스트 이민혜
일러스트 이민혜

‘책&생각’이 7월을 열며 주목받는 작가 3인의 짧은 소설을 특집으로 마련했습니다. ‘책&생각’ 이번호부터 7월16일치까지 3주간 김종광 작가, 황현진 작가, 윤고은 작가의 흥미진진한 작품이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지랖은 해괴한 전화를 받았다. 면사무소 주민자치위원회 소개로 연락드리는데, 시니어 독서토론에 나와 달란다.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일절 돈 얘기를 안 한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세상이 좀 그악한가.

“나 돈 없어요. 그만 끊을게요. 수고하세요” 했지만, 중년 여성의 간절한 목소리에 쉬이 끊지 못했다. 삼동네를 통틀어 책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가장 많이 읽은 시니어니 모임에 꼭 ‘나와주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랖은 오래전부터 해마다 여남은 권의 책을 읽었다. 제 입으로 말한 적이 없지만, 소문이 자자하게 났다. 본의 아니게, 한 40년 동안 ‘삼동네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여성’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삼동네서 책이 가장 많은 집’인 건 틀림없었다. 자식들과 남편이 책을 밝혔다. 자식들이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갖다 놓은 책이 수천 권이었고, 연전에 작고한 남편이 읽지도 않으면서 주워다가 놓은 책도 천 권은 되었다. 책이 있다고 해서 그걸 읽는 건 아닌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하필이면 모임 시간이 오후 1시였다. 괜히 간다고 했어. 내가 거시기했지. 지랖은 면소재지까지 땡볕에 걸으면서 자책했다. 농공단지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라 길도 정신 사나웠다. 차로 모시러 오겠다는데, ‘바쁘신 분이 그럴 필요까지 없다, 운동 삼아 걸어다니니 걱정 말라’고 사양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그런 게 생겼다고 말로만 들어본 ‘역경면민도서관’. 면사무소 앞, 옛날에 오일장 열리던 곳, 장마당 한구석에 있었다. 장마당에서 수박, 채소 장사하던 생각이 났다. 들어가 보니 신기방기했다. 도서관이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책이 아주아주 많았다. 마스크를 썼음에도, 새 건물과 새 책들이 뿜어내는 맹렬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책들아, 너희는 어쩌다가 이 촌구석까지 왔다니. 누가 한가하게 너희를 봐줄까. 도시 사람도 못 읽는 책을 촌사람이 어떻게 읽어.

지랖은 속은 기분이었다. 자신처럼 다 늙은 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을 줄 알았다. 마을회관에 노래 강사가 왔을 때처럼. 50대 초반으로 뵈는 샘(강사) 빼고, 달랑 세 명이 더 있었다. 게다가 그 셋은 시니어(늙은이)가 아니라 주니어(젊은이)로 보였다.

샘이 자기소개를 했다. 듣노라니, 돈만 못 버셨을 뿐 훌륭한 작가였고 교육자였다. 책 읽는 사람은 시골의 가로등, 반딧불이처럼 소중한 존재라고 믿으며, 한 명의 독자라도 더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산다고 했다. 진심으로 손뼉을 쳐주었다.

참석자에게도 자기소개를 시켰다. 58세 남성은 수십년간 개척교회를 운영해온 목사님이란다. 하고 보니 명성을 들어보았다. 60대 초반이라는데 40대 초반으로 뵈는 여성은 중고등학교 행정실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했단다. 53세 여성은 도시에서 여러 사업을 하다가 뜻한 바 있어 귀농했단다.

지랖이 자기소개 할 차례가 되었다. “많이 배우셨고 굉장한 삶을 사셨고, 지금도 멋지게 살고 계신 분들과 함께 앉아 있으니 부끄럽네요. 못 올 데 온 것처럼 불편하네요.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니네요. 저는 선생님들보다 나이 더 먹은 것밖에 없는데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고, 평생 농사꾼 여편네로 산 것밖에 없는데.”

아니란다. 평생 책을 꾸준히 읽어온 사람이 으뜸 훌륭한 사람이란다. 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시니어들도 다투어 지랖을 추어주었다. 학벌, 직업이 어쨌든 독서인이 제일 나은 사람이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자기들보다 아주머니가 책을 더 읽으셨을 거란다.

“자꾸 책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읽긴 뭘 읽어요. 읽고 싶어도 농사꾼 여편네가 책 읽을 시간이 어딨어요. 너무 비가 오거나 너무 춥거나 병원에 들어앉았을 때나 볼 수 있는 게 책이었죠. 평생 읽은 거 다 합쳐도 오백 권이나 될라나.” 그 정도면 엄청나게 많이 읽은 거란다.

샘이 책 제목이 적힌 종이를 나눠주었다. 미리 읽어 와도 좋지만 그냥 와도 좋단다. 여기 와서 함께 읽으면 되니까.

첫날의 책은 <박씨부인전>이었다. 샘이 한 권씩 나눠주었다. 샘은 읽다가 설명하다가 했다. 말을 잘하니까 샘을 하시겠지만, 말을 참 재미나게 잘했다. 질문도 했다. 다른 분들이 착실히 대답했다.

“어머님, 우리 불쌍한 박씨부인이 어떻게 될까요?” 지랖은 퍼뜩 깨어났다. 언제부터 졸았는지 모르겠다. 박씨부인이 한참 고생할 때였는데, 아직도 고생 중인가. 읽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탈바꿈하죠. 이쁘게 돼서 아주아주 잘살아요. 나라도 구하고.”

샘이 또 뭐라고 묻기에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샘이 칭찬했고 다른 분들도 추어주었다. 말을 재미나게 잘하신다. 표현력이 남다르시다. 역시 책 많이 읽으신 분이라 다르시다.

이분들이 나 놀리는 거 맞지? 말도 안 되는 칭찬을 계속해주니 이상하게 무섭기까지 했다. 혹시 이 사람들 사기 장사꾼들 아닌가. 이렇게 노인네 혼 빼놓고 책 사라고 하는 거 아녀? 옛날, 자식 하나가 월부로 30만원짜리 책 사놓고 군대로 도망가버려 대신 갚아준 적이 있었다. 잘못 걸려 300만원짜리만 사도 큰일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쉬는 시간에 샘이 따로 말했다. 독서토론만 있는 게 아니라, 그림그리기도 있다. 책읽기는 소수정예로 꾸릴 수밖에 없지만, 그림그리기는 많을수록 좋다. 동네 친구분들 다 데려오라고. 샘의 의욕은 가상하지만 과연 잘될까. 순회강사가 마을회관에 직접 찾아와서 할 때도 호응이 꽝 수준이었는데. ‘노래교실’ 말고는 잘되는 프로그램을 못 봤다.

지각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 코로나19 터지기 전에 처음 만났던 사람이다. “지역사회보장협의체라고 아시죠. 잘 모르시구나.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이장, 새마을지도자, 주민자치위원, 복지기관 종사자, 자원봉사단체 회원 등 다양하게 모였어요. 이 일 저 일 많이 해요. 아직도 연탄 때고 사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분들께 연탄 배달해 드렸고, 김장도 담가 드리고, 영정사진도 찍어 드리고, 암튼 많은 일을 하는데, 그중에 혼자 사시는 노인 돌보미 사업도 있어요. 혼자 사시는 거 여북 적적해요. 잘 계신지 별일 없으신지 틈틈이 찾아뵙고 그러는 거죠. 이렇게 말동무도 해드리고요. 지가 어머니 담당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코로나 동안 돌보미 아저씨가 때때로 찾아주어 덜 적적했다. 자기가 이 시니어 독서토론 프로그램을 만들다시피 했고 어머님을 적극 추천했단다. 음, 웬수가 여기 계셨군.

샘이 글쓰기도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더러 일기글을 써본 지랖은 차라리 그게 좋을 듯했다. 말하기보다 쓰기가 더 자신 있었다. 글쓰기에 찬성하는 이도 있었고, 글은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혼자 쓰는 거라면서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별문제 아닌 것 같은데 열띠게 갑론을박했다.

또 졸았던 모양이다. 첫날 소감들을 말하고 있었다. 지랖의 차례가 되었다. “제가 지금 꿈속인가 싶어요. 도서관에 들어와 본 것도 처음, 독서토론이 아니라 그냥 토론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토론도 처음, 대학교 나온 분들하고 마주 앉아서 얘기한 것도 처음, 책 얘기 한 것도 처음, 일흔다섯 나이에 처음 겪는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네요. 영광스럽고 감격스럽습니다. 그치만 한 번으로 됐지 싶어요. 저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네요.”

솔직히 말했다가 더 곤란하게 되었다. 모두가 다투어 지랖에게 이 말 저 말 했다. 골자는 ‘그런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다음주에도 꼭 뵙자’였다. 괜히 울컥했다. 내가 뭐라고 이분들이 이럴까. 지랖은 외치고 말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꼭 나올게요.”

귀갓길은 빨랐다. 걸으면 20분도 넘었지만 차로는 3분도 안 걸렸다. 돌보미 아저씨가 태워다 주었다. “엄니, 오늘은 제가 바빠서 못 태워 드렸는데, 다음주부터는 딱 모시러 올 거예요. 어디 숨으시면 안 돼요.”

샘 전화가 왔다. 잘 들어가셨냐고. 오늘 어떠셨냐고.

“너무 좋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나 같은 하찮은 사람이 갈 데는 아니네요. 그분들도 면전이라 덕담 차원으로 그냥 해보는 말씀이셨던 것 같고. 설마 진짜 나 같은 늙은 할망구를 다시 보고 싶겠어요?”

“어머님이 꼭 계셔야 해요. 어머님이 평생 쌓은 지혜도 나눠주시고, 저희도 배울 게 많아요. 결정적으로 책 읽으시면 치매 완전 예방된다니까요.” 샘은 또 한참을 얘기했다. 미안해서라도 계속 엇박자를 놓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갈게요, 갈게. 선생님도 참 너무 애쓰시네요.”

다 겪어 더는 겪을 일이 없다고 버릇처럼 생각한 게 오래전부터였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일이 샘솟았다. 앞으로도 처음 겪는 일이 수없을 테다. 75세에 독서토론이라니. 괜히 흐뭇했다.

김종광 소설가

김종광 작가.
김종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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