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문학동네·1만4000원
윤성희의 여섯 번째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은 제목에서부터 유희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표제 단편의 가족들은 지방에 혼자 사는 고모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간다. 막상 가 보니 고모는 암 얘기가 거짓말이었다고 하고, 그 이야기에 더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역시 ‘거짓말’이라며 늘어놓는다. 고모의 거짓말은 다른 식구들의 거짓말 역시 촉발시키는데, 고모의 암 이야기를 포함한 그 거짓말들이 진짜(!) 거짓말인지 여부는 끝까지 불확실한 채로 남는다.
“우리 가족은 오늘을 만우절로 정했어. 해마다 오늘 거짓말을 해야 해.”
소설 말미에서 화자의 아빠는 이렇게 선언하는데, 고모의 암 발병이라는 어둡고 심각한 사태가 이렇듯 유쾌한 놀이로 몸을 바꾸는 데에 윤성희 소설의 마법이 있다. 고모가 걱정이 되어 내려간 가족들은 고모가 힘들게 사왔다는 토종닭 백숙에 이웃집 창고에서 훔쳐왔다는 인삼주를 곁들여 먹고 마시며 한껏 잔치 분위기를 낸다. 이 작품에서 화자의 남동생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은 채 응급실에 입원했을 때 실제로는 유령이 되어 병실 천장에 떠서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내려다 보았노라는 ‘거짓말’을 들려주며 그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이렇게 요약한다. “깨어난 뒤 생각했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그래서 내가 공부를 안 한 거야.”
여섯 번째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을 낸 작가 윤성희. “내 소설도 누군가의 삶과 멋지게 조우하길. 우연히 스쳐가는 동안 서로 위로를 받길. 정말 그렇게 되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정민영 제공
동생의 이런 깨달음 내지는 결심에 이번 소설집의 주제가 담겼다고 할 수도 있겠다. 책에 실린 열한 개 단편에는 교통사고나 심장마비로 인한 죽음, 암 발병과 전이, 요양원 입원, 퇴직과 해고, 범죄로 인한 옥살이 같은 비극적 사태가 만연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밝고 경쾌하다. 상황이 제 아무리 힘들더라도 낙관과 긍정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적극적·진취적 태도를 윤성희 소설 속 인물들은 공유하는 듯하다. 2019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단편 ‘어느 밤’의 주인공인 노년 여성은 동사무소 문화센터 마술 강사의 말을 위기의 순간에 떠올린다. ‘마술에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유머’라는 말인데, 이 역시 표제작 속 남동생의 말과 통하는 통찰이라 하겠다.
온갖 사고와 불행으로 점철된 가운데에서도 재미와 유머를 찾는 여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놀이’에 그 답이 있다. 윤성희의 소설 주인공들은 요한 하위징아의 책 제목으로 유명해진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라 해야 마땅해 보일 정도로 놀이에 집착한다. ‘여름방학’의 여주인공이 젊은 시절 연인과 꼬깔콘 과자를 먹으며 했던 가장 예쁜 고깔 찾기 놀이, ‘어느 밤’ 말미에 등장하는 얼음 땡 놀이, ‘블랙홀’에 나오는 끝말잇기 놀이를 비롯해 책 속에는 온갖 놀이가 난무한다. 휴일이면 하루종일 시계를 보지 않는 날을 정해 두고 지키는 놀이(‘스위치’), 새벽에 동네를 걸어다니며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놀이(‘날마다 만우절’), 지킬 수 없게 터무니없는 것을 걸고 하는 내기(‘블랙홀’), 미리 칭찬을 해 주고 그에 부합하는 착한 일을 나중에 하게 시키는 놀이(‘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등등.
이뿐만이 아니다. ‘증명왕’ 동아리를 만들어서는 ‘외로운 사람이 감기에 더 잘 걸린다는데 사실일까요?’ 같은 질문을 받고 그 진위를 밝히려 온갖 실험과 인터뷰를 하거나(‘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친한 친구가 크고 작은 사고를 당했을 때 깁스에 가장 먼저 자신의 사인을 남기는 일(‘여섯 번의 깁스’), 또는 퇴직을 기념해 개명을 하거나(‘여름방학’), 아파트 놀이터에 버려진 어린이용 킥보드를 훔쳐 타는 할머니의 귀여운 범죄(‘어느 밤’), 심지어는 남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가 면전에서 욕을 해 주는(‘남은 기억’) 일 역시 넓은 범주의 놀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이와 거짓말과 유머는 사태의 심각성과 비극성을 누그러뜨리고 여유와 관조의 거리를 확보하게 돕는다. 단편 ‘블랙홀’에서 화자는 쌍둥이 오빠와 언니를 보며 “마흔여섯 살이나 되었는데도 둘은 같이 있으면 언제나 십대처럼 굴었다”는 관찰을 내놓는다. 일반적으로 놀이란 아이들의 전유물이어서 나이가 들수록 놀이의 세계에서는 멀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드물게 어른들 중에서 놀이에 빠진 이들에게는 ‘아이 같다’는 힐난성 지적이 따라 붙는다. 현실의 엄중함에 무지하거나 무책임하게 그로부터 도피하려 한다는 뜻이겠다. 마흔여섯 살 쌍둥이 남매가 십대처럼 군다는 것이 듬직하거나 바람직한 일은 아니리라. 그렇지만 시골에 집을 사서 내려갔던 부모님 중 아버지는 사고로 숨지고 어머니는 그에 대한 보복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상황에서라면 끝말잇기나 ‘꼴값하네 놀이’(모든 사안과 사람에 ‘꼴값하네’라는 말을 붙이는 놀이) 같은 유치한 놀이가 주는 위안과 치유의 효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네모난 기억’의 두 주인공 민정과 정민은 대학 시절 만화 동아리 선후배이자 연인 사이였으나 결국 결혼으로 맺어지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제법 세월이 흐른 뒤 여전히 싱글인 민정과 이혼남이 된 정민은 우연히도 장례식장에서 몇 차례 마주치는데, 그런 일이 몇 번 거듭된 뒤 정민이 민정에게 말한다. “한 번만 더 장례식장에서 만나거든 그땐 사귀자.” 연애조차 놀이로 떨어졌다고 개탄할 일은 아니다. 두 사람에게 놀이는 진심을 담기에 제격인 그릇이 아니겠는가.
표제작에서 거짓말에 담긴 진실 역시 같은 이치라 하겠다. 거짓말도 놀이의 하나라 본다면, 소설 또는 문학이라는 거짓말 또한 진실을 담아 전하는 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윤성희가 소설 속 인물들로 하여금 온갖 기상천외한 놀이에 매달리게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