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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렇게 지질한 소설가라니

등록 2021-07-16 04:59수정 2021-07-16 08:11

같았다

백가흠 지음/문학동네·1만4000원

“써야 한다는 강박만큼 인생에 있어 좋은 핑계와 거짓말거리가 없다.”

백가흠(사진)의 소설집 <같았다>에 실린 단편 ‘그는 쓰다’의 주인공인 소설가의 시점으로 서술된 문장이다. 신춘문예로 등단은 했지만 후속작을 쓰지 못하는 그에게 써야 한다는 강박은 존재 증명과도 같다. 전날 밤에 무작정 썼다가 지운 원고를 다음날 오전 내내 되살리려다가 허탕 치고, 오후에는 그렇게 지워 없앤 원고의 내용을 떠올리려 머리를 쥐어짜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동료 소설가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는 저열한 문단 소문이나 나누고, 등단은 이르지만 나이는 어린 동료의 반말에 발끈하는 그의 모습은 소설가에 관한 환상을 깨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새벽 네 시에 재혼한 전처에게 전화를 걸어 딸의 안부를 묻는 남자라니, 우웩!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설정과 예상 밖의 결말은 책 맨 앞에 실린 단편 ‘훔쳐드립니다’에서도 만날 수 있다. 영문학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시간강사를 하다 그만둔 주인공은 이제 시골을 돌아다니며 현금과 보석을 터는 빈집털이를 업으로 삼는다. 철저하게 이중 생활을 하는 그에게는 역시 백수인 애인도 있는데, 최근 들어 소원해진 애인과는 헤어질 궁리를 하고 있다. 애인에게조차 비밀로 삼을 정도로 용의주도하다고 자부하는 그의 범행은 그러나 소설 말미에서 허탈하면서도 놀라운 경위를 통해 발각되고 만다.

‘1983’은 미국으로 입양돼서 성장한 뒤 주한미군이 되어 한국에 온 프랜시스가 친부모를 만나러 강원도로 향하는 이야기다. 강릉에서 그들을 만난 중년 여성은 프랜시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며 울음을 터뜨리지만,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가운데 프랜시스는 제가 성장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코로 우는 남자’에는 중학생 딸이 또래 아이들에게 살해당한 뒤 매일 저수지에 나와 미끼도 달지 않은 낚싯대를 물속에 던져 놓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남자가 나온다. 남자의 딸을 살해한 범인 중 한 아이의 엄마가 그런 그를 찾아와 아들 대신 용서를 구하며 합의서에 서명해 줄 것을 호소한다. 사방에 인적이라곤 없는 저수지에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남자는 “나도 이제 나를 못 믿겠”다고 말하며 긴장감을 높인다. 죽은 어머니의 시체와 함께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인 ‘나를 데려다줘’, 중국 서역에서 십년째 석굴을 파며 수도하는 신라 출신 승려 일문을 등장시킨 ‘타클라마칸’을 비롯해 소설집에 수록된 아홉 단편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작가의 폭넓은 관심사를 보여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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