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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랑으로 일어나려는 사람들 이야기 쓰고 싶었어요”

등록 2021-07-23 08:59수정 2021-07-23 16:52

여성 4대 그린 최은영 첫 장편 ‘밝은 밤’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펴낸 최은영 작가가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야외 카페에서 소설 속 증조할머니에서 주인공까지 이어지는 4대에 걸친 가족 내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펴낸 최은영 작가가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야외 카페에서 소설 속 증조할머니에서 주인공까지 이어지는 4대에 걸친 가족 내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기사에 소설 결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밝은 밤
최은영 지음, 문학동네/1만4500원

“살면서 사람이 꺾일 때가 있잖아요?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외부의 요인으로 꺾이기도 하고, 아니면 자기 마음 안에서 무언가 힘든 부분이 해결이 안 된다거나 하는 경우요. 그때마다 계속 일어나려고 하는 사람들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게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복수하는 것 같은 어두운 방식이 아니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서 아니면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어나려 하는, 계속 사랑하려는 사람들 얘기를요.”

두 소설집 <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호평을 받은 작가 최은영이 첫 장편 <밝은 밤>을 내놓았다. 이혼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서울을 떠나 동해의 소도시 ‘희령’으로 온 지연의 이야기와, 지연이 할머니한테서 듣는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두 축으로 삼고, 할머니의 딸이자 지연의 엄마인 미선의 이야기가 더해져 여성 4대의 서사를 좇는 작품이다. 부계를 기준으로 삼는 어법에서라면 ‘외(증조)할머니’라 칭할 것을 모계 혈족을 뜻하는 접두사 ‘외’를 뺀 채 그저 ‘(증조)할머니’라 일컫는 데에서부터 성차별 질서에 맞서며 그를 거부하는 작품의 기조를 짐작할 수 있다. 지연은 열살 무렵 희령의 할머니 집에 맡겨져 열흘 정도 할머니와 함께 즐겁게 지낸 기억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할머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절연하다시피 연락을 끊고 지내는 바람에 지연 자신의 결혼식에도 할머니를 초대하지 않았고, 이혼한 뒤 도망치듯 서울을 떠난 지연이 희령의 천문대에 취직하게 되면서 20여년 만에 우연히(!) 할머니와 재회하게 된다. 다시 만난 할머니와 손녀는 옛 사진과 편지를 매개 삼아 100년을 거슬러 오르는 시간 여행에 나선다.

“한쪽 눈은 외까풀, 다른 한쪽은 쌍꺼풀이 진 눈매에 숱이 적은 눈썹, 둥근 이마와 짧은 턱, 그리고 작은 귀까지 그녀는 나와 닮아 있었다. 이목구비만이 아니라 앉아 있는 포즈와 표정도 나와 비슷했다.”

여성 4대의 수난과 여성들 사이의 우애를 그린 첫 장편 &lt;밝은 밤&gt;을 낸 최은영 작가. “한동안 글을 못 쓰다가 다시 쓸 수 있게 된 작품이라서 행복하다.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고 21일 &lt;한겨레&gt;와 인터뷰에서 말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여성 4대의 수난과 여성들 사이의 우애를 그린 첫 장편 <밝은 밤>을 낸 최은영 작가. “한동안 글을 못 쓰다가 다시 쓸 수 있게 된 작품이라서 행복하다.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고 21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말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어느 날 할머니가 꺼내온 사진첩에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자 둘이 미소 짓는 사진이 있는데, 그중 한 여자가 지연 자신을 빼닮았다. “너라고 해도 다들 믿을 것 같아”라고 할머니가 말할 정도. 출신지를 따서 ‘삼천이’라 불린 그이는 할머니의 엄마 그러니까 지연의 증조할머니이고, 함께 사진 찍은 이는 삼천이의 둘도 없는 벗이었던 ‘새비’(역시 출신지 이름). 백정의 딸이었던 삼천이가 천주교도였던 증조할아버지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고, 역시 천주교도였던 새비와 평생의 우애를 쌓은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

양인 출신 천주교도 남편 덕분에 백정이라는 신분적 질곡에서 벗어났음에도 증조할머니 삼천이가 이렇게 한탄할 정도로 여성으로서 겪는 수난과 고통은 지독하다. 처음에 천사 같은 구원자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남편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백정 출신 아내를 구하느라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는 “울화와 억울함과 죄책감”으로 아내의 상처를 덧낼 뿐이었다. 그가 아내와 딸을 속이고 이북에 처자가 있는 남자에게 외동딸을 주기로 결정한 데에서 가부장의 횡포는 극에 달한다.

첫 장편소설 &lt;밝은 밤&gt;을 펴낸 최은영 작가가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야외 카페에서 소설 속 증조할머니에서 주인공까지 이어지는 4대에 걸친 가족 내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펴낸 최은영 작가가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야외 카페에서 소설 속 증조할머니에서 주인공까지 이어지는 4대에 걸친 가족 내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이런 증조할아버지에서부터, 외도로 이혼의 빌미를 제공한 지연 남편에 이르기까지 소설 속 남자들은 하나같이 저열하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일한 예외가 새비 아저씨. “도무지, 어떤 경우에라도 남 위에 올라가서 주인 노릇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할머니가 회고했던 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이 초래한 참상을 목격하고서는 천주님의 책임을 따지며 종부성사를 거부한 채 죽음을 맞는다. 이북에 있다던 처자가 월남해 남편을 되찾아가고, 더 나아가 제가 낳은 딸조차 그들 호적에 올리는 사태가 닥치자 할머니는 제 아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바이, 죽어버려요.” 그 말이 씨가 되었던지 아비는 몇 달 뒤 교통사고를 당해 죽지만, 끝내 아내와 딸에게 사과의 말을 하지 않았다. “전남편이 내게 끝내 사과하지 않았을 때, 나도 그에게 죽어버리라고 말했다”고 지연이 술회할 때, ‘여자로 태어나 산다는 죄’가 지난 시절의 일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이렇듯 부정적인 남성상의 맞은편에 여성들의 우애의 풍경들이 있다. 옛 사진 속 주인공인 삼천이와 새비, 그들의 딸들인 지연 할머니 영옥과 희자, 대구 피난 시절 어린 영옥을 예뻐했던 명숙 할머니, 지연 어머니와 명희 언니, 지연과 지우, 여기에다가 지연이 차례로 거두는 유기견 귀리와 유기묘 현미는 상처 입고 꺾인 여성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집에서 보았던 여성 4대의 사진을 희령 할머니 집 장식장 액자에서 다시 만나는 소설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주제를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첫 장편소설 &lt;밝은 밤&gt;을 펴낸 최은영 작가가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야외 카페에서 소설 속 증조할머니에서 주인공까지 이어지는 4대에 걸친 가족 내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펴낸 최은영 작가가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야외 카페에서 소설 속 증조할머니에서 주인공까지 이어지는 4대에 걸친 가족 내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책 뒤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은 “내게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고 밝혔다.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나는 원래가 완전한 허구나 내가 모르는 건 쓰지 못하고 내 경험과 감정을 재료로 삼아 쓰는 작가”라며 “소설 속 지연의 경험이 사실 그대로는 아니지만, 지연이 느낀 감정의 명도에는 나 자신의 감정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단편과 장편은 마치 시와 소설이 다르듯이 완전히 다른 장르라는 걸 이 소설을 쓰면서 알게 됐다”며 “단편을 쓸 때에는 절제해야 해서 오히려 힘들었는데, 장편은 힘을 빼고 쓸 수 있어서 좋았다. 독자들도 쉽고 재미있게 읽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중단편으로 호평을 받았던 작가가 뜻밖에도 첫 장편의 문턱에 걸려 비틀거리거나 아예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일도 드물지 않은 터에, 최은영의 첫 장편은 그가 중단편에 못지않게 장편 역시 잘 쓰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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