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존재의 벼랑 앞에 한줄의 시로 엎드리다

등록 2021-08-06 04:59수정 2021-08-06 09:14

내 따스한 유령들
김선우 지음 l 창비 l 9000원

김선우(사진) 시인은 지난해 봄 갑자기 몸이 아팠다. 몸무게가 10킬로그램쯤 빠졌지만 병원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고향에 가서 1년간 요양을 했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서 여섯번째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의 원고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의 까닭 모를 병은 혹시 코로나19라는 세계적 팬데믹과 관련 있지 않을까. 시집을 내며 편집자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사회적 스트레스가 몸에 미치는 악영향”을 언급하기도 했다.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시집의 제3부는 ‘마스크에 쓴 시’라는 연작 14편으로 되어 있어 팬데믹에 관한 시인의 고민을 짐작하게 한다.

“더러운 그늘은 없어요/ 깨끗한 그늘도 없어요// 더 늦기 전에/ 공평한 그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에게 내준 그늘을/ 지구가 모두 거둬들이기 전에”(‘마스크에 쓴 시 1’ 전문)

“작은 인간이어야 마땅한 종이 탐욕을 제어하지 못할 때/ 거기가 원죄다/ 야생을 포획해 감금하는 인간/ (…)// 우리의 질문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나?/ 우리―/ 다른 존재들을 멸종시키면서 스스로 멸종위기종이 되어가는 우리는”(‘마스크에 쓴 시 12’ 부분)

김선우 시인의 시세계는 생태 페미니즘이라는 큰 틀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런 그가 보기에 코로나19 팬데믹은 그동안 그가 시를 통해 경고했던 위기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는 사태라 할 수 있다. ‘마스크에 쓴 시’ 연작이 아닌 다른 시에서도 그는 인간의 거주지를 “겨울의 시간으로” 옮기자고 제안하며 동시에 그 가능성을 회의한다.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 자본교에 장악당한 지 불과 이백년 만에/ 멸망의 시간을 카운트 중인 우리가?”(‘지구주민평의회가 만들어진다면’ 부분)

그런데 “시집은 울어주는 집”(‘울어주는 일, 시를 쓰는 일’)이지만, 동시에 기쁨을 구가하고 행복을 노래하는 것 역시 시인의 중요한 임무에 속한다. 김선우의 새 시집에서 생명의 약동과 사랑의 환희를 찬미하는 구절들은 팬데믹에 맞설 관능의 힘을 알게 한다.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작은 신이 되는 날’ 부분)

“안녕, 인사하는 나뭇잎들의 독자적인 팔랑거림, 한 방향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할 때조차 저마다 다른 자세와 기술, 햇빛과 물만으로 양분을 만들어내는 천지창조의 노동자들, 함께 사는 동안 자신이 만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때가 오면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는 여유와 자유.”(‘이제 나뭇잎 숭배자가 되어볼까?’ 부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채널예스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