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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선생’ 황현산이 베푼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

등록 2021-08-13 05:00수정 2021-08-13 09:52

2016년 초 ‘시민행성’에서 한 황현산 연속 강의 책으로
“상징주의는 현실 감각 통해 다른 세계를 보려는 것”

전위와 고전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
황현산 지음 l 수류산방 l 2만9000원

불문학자이자 비평가요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였던 황현산(1945~2018)은 말년에 ‘밤의 선생’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는 했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2013)가 뜻밖에도 베스트셀러가 되고 문단 안팎에 일종의 팬덤이 형성되면서였다. 그가 담낭암으로 스러지고 1년 뒤인 2019년 트위터 글을 모은 산문집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가 묶여 나오고, 다시 1년 뒤인 지난해에 유고 평론집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가 출간됨으로써 독자들은 너무 일찍 ‘선생’을 잃은 슬픔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그의 3주기(8월8일)가 허전하게 지나간 것을 안타까워할 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시민 대상 연속 강연을 갈무리한 책 <전위와 고전>이 다음주 중에 출간된다. 황현산은 2016년 1월21일부터 2월18일까지 실천적 인문 공동체 ‘시민행성’에서 자신의 전공인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를 여섯 차례에 걸쳐 베풀었다. 생전에 그가 한 유일한 대중 강좌였던 이 강의에서 그는 샤를 보들레르,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로트레아몽 백작, 폴 발레리, 기욤 아폴리네르 등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00여 년에 걸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계보를 훑으며 그 의미와 유산을 설명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난해하고 추상적으로 여겨지기 십상인 상징주의의 성격과 작품들이 ‘선생’의 친절한 가르침 덕분에 한결 명료하게 다가온다.

황현산은 우선 상징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한다. 흔히 상징주의는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고들 한다. 그러나 “상징주의 자체가 사실주의·자연주의와 거의 같이 일어났”고 “그 이상 자체도 사실주의·자연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황현산의 설명이다. “보들레르는 냉혹한 사실주의자”였고, 오해와는 달리 “보들레르 이후로 가장 현실과 밀착된 이가 랭보”였다. 숫자나 기호로 감추어진 세계를 해석해서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 상징주의라는 식의 이해도 정확하지 않다. “문제는 감각”이다. “상징주의는 우리 내면에 부정이 있고, 저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 다시 감지되고, 우리는 감각을 통해 다른 세계를 보고 살고, 그것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각적 체험에 대한 강조, 문학과 정치적 이상의 연결 고리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현대시의 아버지라 보는 보들레르 시의 특징은 무엇일까. 보들레르 시의 새로움은 덧없는 현대적 삶의 일상성에서 고전주의 예술의 불멸과 영원성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도시의 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간 여성에게서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맛보며 “오 내가 사랑했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여!”라 탄식하는 시 ‘지나가는 여인에게’에 그런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보들레르에게서, 말라르메는 순수라는 개념을 배웠고, 베를렌은 감정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는가를 배웠으며, 랭보는 보들레르의 감각 사용법, 감각의 깊이를 자기 전공 분야로 택했다”. 말라르메가 추구한 순수란 무엇인가. 그는 말라르메의 시학을 가리켜 ‘빼기의 시학’이라 표현한다. “이것도 없애고, 저것도 없애고, 다 없애고 나니까 결국은 순수만 남았”다는 것. 말라르메가 사랑하는 여성을 위해 쓴 연애시 ‘내 낡은 책들이 파포스의 이름 위에’ 마지막 구절 “내가 더 오랫동안 어쩌면 더 열렬히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 옛날 아마존 여인의 타 버린 그 젖가슴”을 두고 황현산은 “없는 가슴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가슴을 대신할 수 있다는” 태도로는 연애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으로 청중의 웃음을 자아낸다.

“의미가 돋보이지 않고 노래만 남게 하는 방식”으로 시를 썼던 “운율의 대가” 베를렌, 온갖 책에서 가져온 구절들로 범벅이 되다시피 한 패러디를 가장 큰 특징으로 삼았던 로트레아몽 백작, 완벽하지만 감동은 없는 발레리를 거쳐, 정형시의 틀을 깨고 자유시와 실험시의 세계를 연 ‘시의 민주주의자’ 아폴리네르로 강의는 이어진다. “(아폴리네르의) 시가 가지는 직접성, 현장성은 우리 시대 시가 가진 직접성이자 현장성이고 현실성”이며 “동시에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그래서 그 세계만 말하고 끝나지 않(으며), 어떤 감정의 시적 명상적 효과가 언어 속에 살아 있어서 그 말 하나, 그 시가 묘사하는 세계 하나하나, 그 시가 이야기하려는 서사 하나하나가 그 역할을 넘어서서 벌써 다른 세계를 지시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더 큰 세계를 포괄하는 성격을 갖게 된 것”이라는 설명은 그가 프랑스 상징주의자 가운데에서도 특히 아폴리네르를 전공한 까닭을 짐작하게 한다.

황현산은 생전에 불문학자나 비평가, 에세이스트보다 번역자라는 정체성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이 강의록에도 장만영과 김현 등의 오역에 관한 지적을 비롯해 번역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보들레르와 말라르메가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프랑스어와 영어 사이의 낙차 또는 틈새가 창조적 언어 사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번역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던 그도 로트레아몽 백작의 대표작 <말도로르의 노래> 번역 체험은 ‘죽음’이었노라고 고백하는 대목도 있다. “저도 번역을 하다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그럴 때는 정말 주어 동사 맞추어서 컴퓨터가 번역하듯 해 나갑니다. 내가 알 때까지 다시 읽고 읽어 봅니다. 아, 이 소리겠구나….”

책에는 290여 개의 사진과 도판이 자료로 첨부되어 있다. 강의 내용과 관련되는 황현산 자신의 지난 글들을 비롯해 꼼꼼히 채워 넣은 주석은 편집자의 남다른 공력을 짐작하게 한다. 황현산의 평생지기였던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해설, 김정환·송승환·함돈균·김민정 등 후배 문인들의 회고 글 역시 곁들여져 3주기 추모의 의미를 더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nbsp;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황현산(1945~2018)은 프랑스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 번역가였다. 평론집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현된 불행> 등과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등을 냈고, <어린 왕자> <시집> <알코올> <초현실주의 선언> <파리의 우울> <악의 꽃> <말도로르의 노래> 등을 옮겼다. 지병으로 작고한 뒤 산문집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와 평론집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가 나왔다. 경남대와 강원대를 거쳐 1993년부터 고려대 불문과에서 가르치다가 정년퇴임했다. 팔봉비평문학상, 대산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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