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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사라진 일제말 한국문학에서 다양한 모더니즘 읽어냈죠”

등록 2021-08-18 19:04수정 2021-08-20 16:53

【짬】 캐나다 토론토대 자넷 풀 교수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와 아일랜드 작가 콜름 토이빈을 가장 좋아해요. 이번 여름에 읽은 더글러스 스튜어트의 <셔기 베인>도 감동적이었어요. 요즘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재미로 배우지만, 능숙해지면 문학 작품도 읽고 싶어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을 묻는 말에 풀 교수가 내놓은 답이다.                                                                         사진 풀 교수 제공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와 아일랜드 작가 콜름 토이빈을 가장 좋아해요. 이번 여름에 읽은 더글러스 스튜어트의 <셔기 베인>도 감동적이었어요. 요즘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재미로 배우지만, 능숙해지면 문학 작품도 읽고 싶어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을 묻는 말에 풀 교수가 내놓은 답이다. 사진 풀 교수 제공

<미래가 사라져갈 때-식민 말기 한국의 모더니즘적 상상력>(문학동네). 자넷 풀 캐나다 토론토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가 2014년 영문으로 낸 책이다. 최근 김예림 연세대 교수와 최현희 한국외국어대 교수 번역으로 국내 출간됐다.

일제강점기 모더니즘 계열 작가인 이태준·박태원·최명익과 역사철학자 서인식, 모더니즘 문학비평가 최재서, 사회주의 계열 소설가 김남천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독립에 대한 희망도 사라지고 한국어로 글도 쓰기 힘든 식민 말기에 당대 한국 작가들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대응했는지 살핀 책이다. 저자가 미 컬럼비아대학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에서 받은 박사 논문을 발전시킨 이 책은 모더니즘학회 도서상(2015년)을 받았다. 북미와 유럽 쪽 학자들 중심인 이 학회가 비서구 문학서에 상을 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지난 12일 전자우편으로 만난 풀 교수는 이 수상을 두고 “영어권 한국문학 연구를 미국과 영국 등 다른나라 문학 연구와 같은 수준에서 인식하고, 한국 모더니즘도 서구 모더니즘과 같이 관심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밝혔다.

근대주의라고도 하는 모더니즘은 종교나 전통 등 기존 권위를 비판하고, 과도한 개인주의나 물질문명이 부른 인간성 상실 등에 초점을 맞춘 예술사조를 말한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됐으며, 일제 시대 ‘오감도’ 같은 난해시를 쓴 이상 시인이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로 분류된다.

영국 서남부 글로스터셔주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 고향이라는 작가는 토론토대학에서 한국문학사와 한국 모더니즘사, 문학번역 이론과 실천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1987년 들어간 런던대 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한국어를 처음 배웠고 미 하와이대학에서 한국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래가 사라져갈 때> 표지.
<미래가 사라져갈 때> 표지.
풀 교수는 한국문학 번역가이기도 하다. 2009년에 이태준 수필을 번역한 <동방 정취>를 펴냈고 3년 전에는 ‘이태준 단편선’도 영문으로 출간했다. 지금은 내년 출간 예정으로 ‘최명익 단편집’ 번역을 마무리하고 있단다. “시인 오장환 등 월북 작가들 연구도 따로 하고 있어요. 오장환이 러시아 농민 시인 에세닌을 번역한 시집에 특히 관심이 많아요. 앞으로 (해방공간인) 1940년대 후반의 한국문학 작품과 실천에 대해서도 책을 쓰고 싶어요.” 그는 이태준과 최명익 작품을 옮긴 이유에 대해 “문체가 서정적이고 단편 형식이 완숙해서 좋아한다”고 밝혔다.

그가 집필에 10년도 더 걸렸다는 <미래가 사라져갈 때>를 두고, 앨런 태즈먼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학문성과 개념적 사유에서 세계적 수준”이라며 “한국이라는 지역적 사례를 통해 식민 말기의 복잡한 시간성이라는 문제를 폭넓게 해명하고 문화가 이러한 시간 인식을 문화적 형식 속에 어떻게 각인하는지 밝히고 있다”고 평했다.

이 말처럼 저자는 책에서 ‘미래가 사라져버린 일제 말의 문화적 형식 속에 새겨진 시간성’을 끈기있게 파고든다. 그는 일제 말 친일로 돌아선 비평가 최재서와, 이 비평가가 만든 친일 문예지 <국민문학>에 일본어로 소설을 투고한 김남천의 시간 인식을 이렇게 견준다. ‘최재서는 일본을 위해 죽으라는 제국의 요구에 ‘지금까지 쭉 자신은 일본인이었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기원으로서 ‘천황의 시간’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편 김남천은 소설 <어떤 아침>에서 일본인으로 살아갈 ‘나의 아이의 미래’에 대해 주저하는 태도를 보인다. 미래 공동체에 대한 염려를 암시한 것이다.’

철학자 서인식의 ‘동양문화 담론’을 두고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긍정했다. 풀 교수는 ‘도시 변두리의 시간’을 보여주는 박태원 소설(<자화상> 연작)의 “치렁치렁한 문장”에서는 일상을 지배하는 의식의 뒤틀림과 예측 불가능함을 읽어냈다. 최명익 소설에서 두드러진 일상과 디테일은 “사라진 미래를 대체하는 일종의 역동적인 불화”로 해석했다. 이태준 수필 <무서록>을 두고는 “이태준이 유가적 선비의 이상화된 과거로서의 동양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회정치적 경제와 교차하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라고 의미를 풀었다.

학부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풀 교수는 대학 4학년 때 처음으로 한국문학을 만났단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 2년 동안 국제사면위 활동을 했어요. 전두환 5공 정권 말기였죠. 그때 한국의 인권 뉴스를 많이 접하면서 한국에 관심이 생겼어요. 한국어 공부는 대학 2학년 때 시작했죠.”

미 컬럼비아대학 박사논문 토대로
2014년 ‘미래가 사라져갈 때’ 펴내
‘식민말기 한국의 모더니즘적 상상력’
최근 김예림·최현희 교수 번역 출간

80년대말 런던대 시절 한국어 배워
“다음엔 일제 한국 여성작가 연구도”

왜 일제 말 한국문학에 주목했을까?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폭력적 흐름이 그 시절 한국에서 다 보입니다. 제국주의와 파시즘, 시골에서 도시로의 대규모 인구이동, 산업화 등이 그렇죠. 신여성도 나타나고요. 동시에 근대문학과 예술도 퍼져나갑니다. 20세기 역사와, 그 역사와 문학이라는 형식이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지는 지금도 저의 관심사입니다.”

그는 일제 말 한국문학이 글로벌 모더니즘의 흐름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다고 봤다. “모더니즘은 변경과 가까운 사고 형식입니다. 그 시기 한국에서 극도의 변화와 폭력이 있었기에 다양한 모더니즘이 나타났다고 생각해요. 전에는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새로 겪으면서 그에 대한 반성의 방법으로 모더니즘을 생각한 거죠.”

그는 책에서 일제의 한국어 말살 정책이 당대 한국문학에 미친 영향도 비중 있게 다뤘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언어를 없애려고 한 사례는 많아요. 하지만 한국어처럼 근대화된 언어, 그러니까 이미 근대 제도에 도입된 언어를 폭력적으로 없애려고 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어요. 예컨대 많은 식민지에서 근대 소설이 제국주의 언어로 쓰였어요. 하지만 한국은 지금도 나라를 대표하는 소설인 이광수의 <무정> 등 여러 작품이 (일제 말에 앞서) 한국어로 쓰였잖아요?”

일제 말 모국어를 빼앗긴 한국 작가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언어는 사고와 사회관계의 역사적 축적물입니다. 개인은 언어를 통해 개인이 되고 다른 사람과 관계 맺어요. 언어를 빼앗기면 이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작가는 더 그래요. 물론 어떤 이들은 다른 언어를 배워 작가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언어를 빼앗기는 일은 자신에게 아주 친밀한 것들을 빼앗기는 것이죠.”

그는 이번 책에서 여성 작가들을 다루지 못했다면서 앞으로는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책을 쓸 때 일제 말 활동한 최정희라는 여성 작가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자료를 훑어 볼 시간 여유가 없어 다루지 못했어요. 역시 여성인 지하련 작가 작품도 작년에야 읽었어요. 전에 알았더라면 더 열심히 연구했을 겁니다.”

풀 교수가 번역한 이태준 단편집 표지.
풀 교수가 번역한 이태준 단편집 표지.

풀 교수가 번역한 이태준 수필집 표지.
풀 교수가 번역한 이태준 수필집 표지.
왜 연구와 번역을 병행하냐고 묻자 그는 “번역도 천천히 읽는 방법의 하나”라며 덧붙였다. “저는 영어로 된 작품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작품을 최대한 넓게 읽으려고 해요. 제가 한국 작품을 읽을 때 어려움은 비교적 천천히 읽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천천히 읽으면 읽기의 질이 다른 것 같아요. 의미가 더 들어와요. 또 번역이라는 실천을 통해 작품의 다른 측면을 알 수도 있어요.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작가에게도 시간과 사랑을 바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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