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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격렬한 서정시로 인종주의에 맞서다

등록 2021-08-20 05:00수정 2021-08-20 09:29

한국계 이민 2세 여성 시인이
부대끼고 웅크리고 격돌하는
혼란 가득한 정체성 찾아가기
연대의 역사에서 되찾는 가능성
1970년대 한인 이민자 가족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미국에 정착해가는 과정을 포착한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마이너 필링스>는 196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에게 태어난 한인 2세 미국 여성 시인이 인종주의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써내려간 에세이이다. 판씨네마 제공
1970년대 한인 이민자 가족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미국에 정착해가는 과정을 포착한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마이너 필링스>는 196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에게 태어난 한인 2세 미국 여성 시인이 인종주의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써내려간 에세이이다. 판씨네마 제공

마이너 필링스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l 마티 l 1만7000원

까칠하다. 분노와 불안과 짜증이 시시때때로 지면을 뚫고 행간을 헤쳐나와 솟구친다. 음울함과 수치심이 그 아래로 웅크린다. 지은이 캐시 박 홍은 한국계 미국 이민 2세다. 여성이다. 이중, 삼중의 소수자다. 시인이다. 자꾸만 거울을 쳐다보고 우물을 들여다보며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예술가다. 사소한 느낌을 사소하게만 바라볼 수 없어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슬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마이너다. <마이너 필링스>는 다층적이고 중의적이다. 소수자의 감정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이야기들은 흩뿌려질 수밖에 없다. 그 모습 자체가 ‘마이너’라는 존재이며, ‘필링스’ 고유의 양식이다.

지은이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1965년 미국 이민이 열리자 미련 없이 남한을 떴다. 한국은 떠나야 할 곳이었다. 전쟁과 가난, 독재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미국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그러나 쉬울 리 없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부모 아래 태어나 자란 지은이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한국어로 살았다. 초등학교 입학이 마치 이민 같았다. 예정된 소수자의 삶이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부모님이 구해준 빨간 토끼 아래 영문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낯선 시선들과 마주쳤다. 도색잡지 티셔츠였다. 지금도 세계 곳곳, 특히 영어를 쓰지 않는 아시아 국가들에선 영어 사용자들이 기묘하게 생각할 그림과 문구가 박힌 옷들을 아무렇지 않게 입는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인종을 가릴 것 없이 기묘한 시선을 던진다. 지은이는 아시아 여성 이민자 2세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예술대학에 진학해 그림을 그리며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만나고 의지하고 거리를 두고 다투고 화해하며 살아낸다. 시인이 되어 글을 쓰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대학에서 가르친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인종 정체성을 소재로 글을 쓰는 일은 중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다는 편견을 한참 고수했는데, 그런 변명의 저변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그것을 비집어 열어야 했다.” 이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자전적 에세이? 정체성을 찾아 헤매기? 헤매긴 하지만 목적은 뚜렷하지 않다. 굳이 설명하자면 정체성 근처를 배회하며 끊임없이 분주하게 헤매기 정도가 될 수 있을까? 지은이는 혼돈에 빠져 있다.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강한 의지는 없다. 오히려 혼돈과 맞서는 것, 찝찝함을 직시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비집어 열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마치 해부용 테이블에 뇌를 올려놓고 반으로 갈라 글쓰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신경을 핀셋으로 골라내는 것 같았다.”

독백이면서 방백으로 가득한 문장들을 보자. 지은이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자문자답하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정리하고 또다시 이야기를 꺼내고 다시 주저앉았다가 다시 힘을 낸다. “이 책은 배은망덕한 책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부채 의식을 지닌 작가는 환심을 사려는 이야기를 쓸 확률이 높다. 나도 이 나라에 그야말로 빚을 졌지만 나는 오히려 항상 배은망덕할 것이다.” “이제 깨닫지만, 내가 글쓰기에 끌린 것은 우리 가족을 부당하게 재단했던 사람들을 재단하고, 내가 그 상황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음을 입증하려는 목적도 얼마간 있었다.” 그래서 글은 분절과 지속을 반복한다. 끊어졌다가 이어지고 이어졌다가 끊어지며 서사들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으나, 멀리에서 서로 연결되어 형체를 담아낼 수 없는 다차원을 형성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순간 백인을 비웃으면서 마치 내 일처럼 흑인 억압에 격분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백인과 동조하고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시아 인종의 여성 미국인이 처한 울퉁불퉁한 현실이다. 그래서 그는 고뇌하는 삶이 숙명이다. 질문이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일에 관해 내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다문화적 합일성이라는 안이한 환상이나 도덕성을 과시하는 살균된 언어에 기대지 않고서 쓸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관해서도 쓸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맴돌기만 하지는 않는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마이너 필링스’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정리한다.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 사회적 상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권력의 역학을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이며, 그 서열에서 내가 피해자-또는 가해자-로서 점하는 위치를 깨닫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느끼는 치욕이다.” 이럴 때 시적 표현은 효과적이다. “나는 개들이 목에 두르는 수치의 깔때기다. 나는 남자 소변기에 부착하는 수치의 변기 탈취제다. 이 감정이 내 정체성을 갉아먹어 결국 몸은 껍데기로만 남고 나는 하얗게 불타오르는 수치심 덩어리로 화한다.” “인종에 관한 글쓰기는 이제까지 우리를 지워버린 백인 자본주의 인프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격렬한 비판을 담지만, 우리의 내면이 모순들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이기도 하다.”

혼잣말만 있진 않다. 친구들, 가족들의 극적인 서사는 아프게도 때로 웃기게도, 술술 읽힌다. 테레사 학경 차(1951~82), 유리 고치야마(1921~2014) 등이 등장하며, 지은이는 거기서 길을 찾아나선다. 테레사 학경 차가 살아 있었다면 백남준과 나란했을까, 넘어섰을까. 전도유망한 아방가르드는 강간·살인 당한다. 비디오와 행위 예술, 전위적인 시, 연극, 영화, 문화이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던 여성은 첫 저서인 <딕테> 출간 사흘 뒤 뉴욕에서 요절했다. 지은이는 “학경 차에게 빚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맬컴 엑스(X) 암살 장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리 고치야마는 “상부상조와 연대라는 대안 모델을 제시했던” 이다. 지은이는 “잃어버린 역사의 한순간을 돌아보자”며 매듭 짓는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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