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경희대 권택영 명예교수
“코로나로 고립된 시간에 평소 바빠 제쳐 놓았던 고전문학을 읽으면 어떨까요? 재밌다고 인터넷 비주얼(영상)에 너무 몰두하면 나 자신이 좁아집니다. 깊이 있는 문학 작품을 읽으면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넓힐 수 있어요. 상상력도 키우고 내 마음 속에 스스로 비주얼도 만들 수 있죠.”
영문학자인 권택영 경희대 명예교수는 2천년대 들어 뇌과학에 기반을 둔 심리학을 문학과 융합하는 연구를 해왔다. 3년 전 펴낸 <생각의 속임수>(이하 글항아리)나 최근 나온 <감정 연구-따뜻하고 친근한 감정의 힘> 모두 뇌과학과 심리학, 문학을 하나로 연결한 책이다. 4년 전 미국 출판사(렉싱턴 북스)에서 영문으로 출간한 <나보코프의 프로이트 흉내내기>나 최근 같은 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맺은 <헨리 제임스의 심리학>(가제)도 마찬가지다.
그는 1990년대 국내 학계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현장 문학비평도 활발히 펼쳐 ‘김환태 평론대상’(1997년)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글을 국내에 처음 번역해 알린 <욕망 이론>(1993)과 20세기 소설 이론으로 한국문학 작품을 분석한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1995) 등 모두 20권(번역서 포함)이 넘는 저서가 있다.
지난 26일 서울 송파구 잠실역 근처 연구실에서 권 교수를 만났다.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다윈진화론이 바탕에 깔린 게 뇌과학입니다. 외부 자극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동물이나 인간 모두 같아요. 동물은 몸의 반응으로 끝나지만, 인간은 의식이 진화해 그것을 느낌으로 감지하죠.”
삶의 고통이 겹친 1980년대 후반 지그문트 프로이트(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의 심리학에 빠졌다는 그가 자연과학인 뇌 연구에 주목한 계기는 2001년 미국 럿거스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였단다. “대회 기조 연설자가 프로이트를 뇌과학자로 규정하더군요. 뇌과학에 기초한 심리학 연구 패러다임은 그때 시작됐죠. 지금도 이 흐름은 계속되고 있어요.”
권 교수는 책에서 감정을 이렇게 정의했다. ‘외부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몸의 반응.’ “인간처럼 의식이 진화한 동물은 외부 자극에 대한 몸의 반응을 직접 감지하지 못하고 뇌의 전두엽에 저장된 과거 자료를 학습·분석하고 느낌으로 인지합니다. 느낌은 인지와 거의 같죠.”
‘감정이 먼저 몸을 통해 나타나고 의식은 그 후에 감정을 느낀다’는 뇌과학 이론에 따르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우니까 슬프다’이다. “두려움 그리고 뭔가를 바라는 추구가 가장 원시적 감정이라면 자존감은 인간의 가장 진화한 감정이죠.”
그는 “전통적으로 감정과 이성적 판단을 분리해 감정은 나쁜 것으로 보고 억누르려 했지만, 최근 뇌과학 연구는 느낌과 판단·인지를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본다”며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주체’로 내세운 ‘의식’의 한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뇌과학자들은 뇌 변연계 중 해마가 경험을 저장·인출하는 기능을 맡고 이 경험은 전두엽에 따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외부 자극에 의식이 어떻게 대응할지 판단할 때 전두엽에 저장된 과거 경험과 순간적으로 상의하는데요. 이때 오류가 생길 수 있어요. 경험을 인출하는 해마는 현재를 따라가기에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기억해요. 이 시차가 오류로 이어지는 거죠.”
권 교수는 책에서 풍부한 감정은 외부 자극에 경고음을 내 생명을 지키는 것은 물론 판단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사실 전두엽에 저장된 기억이 그 사람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세상을 많이 경험하거나 독서나 친구들과의 교감으로 그 경험이 전두엽에 많이 쌓일 때 판단도 정확해지죠. 더 큰 오류도 막을 수 있고요.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단정하거나, 안다고 확신하는 것은 오히려 경험의 축적을 막아 더 큰 실수로 연결됩니다.”
저자는 ‘따뜻하고 친근한 감정의 힘’을 책 부제로 삼았다. “뇌과학 선구자인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따뜻하고 친근한 기억이 오래 저장된다고 했어요.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내가 마음을 닫으면 기억이 나지 않아요. 따스하고 친근한 기억은 뇌에 많이 남아 감정을 풍부하게 하고 삶도 풍요롭게 하죠.”
1980년대 ‘프로이트 심리학’ 심취
2000년대 뇌과학·심리학·문학 융합
‘생각의 속임수’ 이어 ‘감정 연구’ 내
“세상과 관계 균형 찾는 감정연습 중요”
“코로나 고립시간 ‘고전문학’ 독서 유익” 라캉 번역 ‘욕망 이론’ 등 20여권 저술 그는 “사람은 혼자 내버려두면 부정적 감정이 커진다”며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균형을 찾는 게 감정연습에서 매우 중요하다”고도 했다. “후회와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은 사람의 건강을 해칩니다. 사람이 일하는 것은 불안을 메꾸기 위해서죠. 하지만 이런 추구 감정도 너무 지나치면 좋지 않아요. 좋은 예술 작품도 보고 친구와 교감도 하고 문화, 사회적 교류를 하며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해야죠.”
그는 요즘 뇌과학과 심리학의 화두는 ‘공감’이라며, 공감은 ‘감정의 꽃’이라고도 했다. 그 생각에 공감력을 키우는 좋은 방법의 하나는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다. “공감은 영어(empathy)로 ‘너의 마음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네 처지가 되어보는 것이죠. 문학의 최고 윤리가 바로 공감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는 작중 인물과 ‘동일시’도 하고 ‘거리 두기’도 하죠. 작품을 즐기려면 동일시가 필요하고 또 거리 두기를 해야 내가 작중 인물의 운명이 아닌 것에 안심할 수 있죠. 이게 바로 공감력을 키우는 길이죠.” 그는 소설 두 권을 예로 들었다. “주요섭 작가 단편인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10살 옥희 눈에 들어온 세상을 보여줍니다. 옥희 시선에는 세상에 이상한 일이 많아요. 독자들은 이 작품을 보며 10살 아이는 세상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생각해요. 소설을 보며 공감력이 커지는 거죠. 1920년대 미국 소설 <위대한 개츠비> 주인공 개츠비는 젊은 시절 사랑한 데이지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순수하다고 믿어버립니다. 이 단정적 믿음이 그에게 화를 부르죠. 내가 너를 안다, 혹은 너와 같은 생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독재나 소유입니다.”
뇌 과학 공부로 인간에 대해 이해가 달라졌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답했다. “문학이 앞서 다 한 것을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이 연구로 말했어요. 뇌과학을 공부해보니 세상 살기가 참 어렵다, 건강을 위해 긍정적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요. 그렇게 하려면 종교나 좋은 예술 작품을 보는 게 도움이 많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잖아요. 뇌과학과 연결되는 생각이죠.”
권 교수의 뇌 과학 공부는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에 많이 기대고 있다. 윌리엄의 동생인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형의 심리학 이론을 <여신의 초상> 등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기도 했단다. ‘윌리엄 심리학’을 언제 만났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약 20년 전 번역판으로 윌리엄 제임스 주저 <심리학의 원리>(1890년 초간)를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러다 10년 전쯤 영어 원서로 책을 봤어요.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공부해왔죠. 윌리엄은 의식이 고정된 실체라는 기존 통념을 뒤엎은 혁신적인 뇌과학자였죠. 그는 의식은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타자를 포함해 나와 대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르며, 몸과 물질도 의식의 일부라고 봤어요.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즘 문학 기법에도 영향을 미친 이 통찰은 후대 뇌과학자들에 의해 그대로 증명되고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권택영 교수가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감정 연구> 표지.
2000년대 뇌과학·심리학·문학 융합
‘생각의 속임수’ 이어 ‘감정 연구’ 내
“세상과 관계 균형 찾는 감정연습 중요”
“코로나 고립시간 ‘고전문학’ 독서 유익” 라캉 번역 ‘욕망 이론’ 등 20여권 저술 그는 “사람은 혼자 내버려두면 부정적 감정이 커진다”며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균형을 찾는 게 감정연습에서 매우 중요하다”고도 했다. “후회와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은 사람의 건강을 해칩니다. 사람이 일하는 것은 불안을 메꾸기 위해서죠. 하지만 이런 추구 감정도 너무 지나치면 좋지 않아요. 좋은 예술 작품도 보고 친구와 교감도 하고 문화, 사회적 교류를 하며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해야죠.”
권 교수가 4년 전 미국 출판사에서 펴낸 <나보코프의 프로이트 흉내내기> 표지. “출판사가 프로이트를 주제로 기획한 학술 시리즈물 중 하나였죠. 책을 낼 때는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지만 출간 뒤 미국 등 여러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이 출판사와 최근 계약한 <헨리 제임스의 심리학>(가제)도 지금 당장은 어떻게 원고를 마무리해야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권택영 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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