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중국어문학 번역·출판계에서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김태성(62) 번역가가 후계자를 모집한다. 그동안 그가 해온 일들을 이어갈 수 있는 뜻있는 젊은이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가 해온 일들’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이, 이 채용공고의 함정이다.
김태성 번역가는 1989년 첫 번역서를 낸 이래 32년간 130여권을 번역·출간한 이 분야 일인자다. 그러니 그의 후계자는 무엇보다, 번역을 잘해야 한다.
“중국어문학 번역이란 단순히 뜻만 옮기는 게 아니라 작품의 느낌, 분위기, 맛까지 충분히 이해한 다음 한국어로 최대한 핍진하게 재현하는 일이에요. 잘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중국 고전에도 해박해야 해요. 중국어권 작가들은 고전을 수도 없이 인용하는데, 그냥 쓱 한 줄 흘리는 식이거든요. 배경지식이 없으면 오역하기 쉽습니다.”
중국어 시는 최초의 시집인 <시경>부터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니 시에 함축된 의미를 이해하고 운율까지 살려 한국어로 다시 쓰려면 “시집을 500권은 읽어야 한다.”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라, 그는 실제 500권 넘는 시집을 읽었다.
번역가이기 이전에 “책 읽는 사람”인 김태성 번역가를 지난달 24일 경기 고양시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46㎡(14평) 공간에는 중국어와 한국어로 쓰인 문학과 인문학 책 8000여권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가 베이징, 타이베이, 싱가포르, 홍콩 등을 오가며 수화물 중량 초과 한도까지 눌러담아 이고지고 온 것인데,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귀한 책도 제법 많다. 이 책들을 자산 삼아 한·중문학 전문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후계자가 이어가야 할 김태성 번역가의 ‘일들’ 가운데 또 하나는 중국어 문화권과 한국 사이에 섬세하고 품격 있는 ‘문학의 다리’를 놓는 일이다. 1995년 어느 날, 김태성 번역가는 천안문 사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콜로라도에 머물던 중국의 석학 류짜이푸가, 콜로라도대 객좌교수로 초빙되어 미국에 온 또 다른 석학 리쩌허우를 한 주에 한 번씩 만나 중국의 지난 100년을 돌아보는 대담을 하고 이를 <고별혁명>이라는 책으로 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번역해 국내에 출간하고 싶었지만 저작권 문제를 풀 길이 없어 몇 년을 고심하다가 류짜이푸가 홍콩성시대 객좌교수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날아갔다.
“번역한 책을 양면인쇄하고 가제본해서 가져갔어요. 류짜이푸 교수에게 보여주면서 ‘책을 잘 만들어줄 한국의 출판사를 소개할 테니 계약을 하자’고 하니까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기꺼이 사인하셨죠.”(웃음)
<고별혁명>(북로드·2003)은 그렇게 한국 독자를 만났다. 김태성 번역가는 베이징과 대만, 홍콩의 서점과 도서전 등을 다니며 좋은 중국어책을 발견해 저자를 만나고 국내 출판사와 연계해 출간하는 일을, 번역만큼이나 꾸준히 해왔다.
한 번 맺은 인연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졌다. 류짜이푸 교수를 두 번째 만났을 때, “한국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뛰어난 작가이니 꼭 책을 내달라”고 부탁받은 이가 지금은 세계적인 소설가가 된 옌롄커다. 김태성 번역가는 당시 류짜이푸 교수가 건넨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웅진지식하우스·2008)부터 올해 나온 <일광유년>(자음과모음)까지 10권의 옌롄커 소설을 번역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출간된 후 한 재단에서 포럼에 참여할 만한 중국작가를 소개해 달라기에 옌롄커를 추천했어요. 그때 한국에 온 것이 옌롄커의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출판사 관계자를 함께 만나고, 관광도 하고, 마침 광화문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열리기에 거기도 함께 갔어요. 중국에선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니 작가로서 의미있는 경험이 되겠다 싶었죠.”
돌아가는 길, 공항까지 혼자 가기 두려워 그의 소맷단을 붙잡던 옌롄커는, 지금은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이자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한해의 절반을 중국 밖에서 보낸다. 자신의 작품을 번역한 30여개국의 번역가들을 한자리에 초대해 김태성 번역가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의미 있는 시간을 선물하기도 했다.
자비를 들여가며 좋은 작가에게 더 큰 세상,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길을 열어주는 건 번역가 본연의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인연을 맺어 그의 제안에 당장이라도 자신의 최신작을 내어줄 중국어권 작가는 줄잡아 400명쯤 된다. 이 400명의 명단과 연락처를 고스란히 물려받게 될, 김태성 번역가의 후계자가 되는 마지막 조건은 “이 모든 일을 즐겁고 신나게, 문학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사진/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탕누어 지음 l 글항아리(2017)
대만의 문화평론가이자 유명한 독서가인 탕누어가 책읽기를 매개로 펼치는 지식과 사유의 세계. 김태성은 이 책을 “수렁에서 건진 내 귀한 딸”이라고 부르는데, 번역이 까다로워 출간에 큰 고비를 맞았다가 마지막에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일광유년
옌롄커 지음 l 자음과모음(2021)
중국문학계의 살아있는 거장으로 불리는 옌롄커의 최신작. 요추 부상으로 병상에 누운 채 4년간 매일 조금씩 친필로 원고를 써서 완성한 장편소설이다. 김태성은 “옌롄커의 작품 가운데 소설적 재미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연월일옌롄커 지음 l 웅진지식하우스(2019)
옌롄커 입문자라면 이 책부터! 국내에 출간된 옌롄커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중편소설집인 <연월일>은 “옌롄커 작품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소수의 등장인물과 소소한 사건들로 “인간세계의 복잡한 감정과 욕망을 통렬하게 드러내는” 점에서다.
황인수기주톈원 지음 l 아시아(2013)
대만 소설가이자 허우샤오시엔 감독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도 유명한 주텐원의 대표작으로 제1회 <중국시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대만 ‘동지문학’의 대표작을 읽으며 “문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경험”을 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