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조영헌 지음 l 민음사 l 2만8000원
시진핑 시대 중국 정부가 내세우는 ‘일대일로’(一帶一路) 가운데 이른바 ‘해상 실크로드’에 해당하는 ‘일로’는 여러 의문을 자아내곤 한다. 명대 정화의 선구적인 해양 원정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내세우지만, 되레 중국은 ‘해금’(海禁) 정책 등 해양 진출보다는 바닷길을 막고 통제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해양 진출에 적극적이었던 서양이 줄곧 중국에 뒤처졌던 생산력을 역전한 ‘대분기’의 원인이라는 풀이도 있다.
중국사학자 조영헌(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은 최근 펴낸 저작 <대운하 시대 1415~1784>에서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대운하’라는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중국에 있어 15~18세기는 대륙 내부의 물길을 틔운 대운하가 번영한 ‘대운하 시대’였으며, 이는 제국으로 하여금 해양을 완전히 차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개방할 수도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논지다. 지은이는 대운하 시대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여덟 가지 에피소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를 전개해 나간다.
명 태조 홍무제는 남경을 도읍으로 정했었으나, 쿠데타로 집권한 영락제는 이를 북경으로 옮겼다. 이를 가능하게 한 배경은 회통하, 청강포 등 대륙의 남과 북을 물길로 이을 수 있는 대운하 주요 구간의 개통이었다. 내륙 수상 운송 네트워크인 대운하 덕분에 정치 중심지인 북경은 경제 중심지인 강남에서 안정적으로 물자를 제공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경은 변경 지역에 더 가깝기 때문에 끊임없는 북방의 위협은 정책 결정자들로 하여금 무엇보다 북경의 안보를 최우선시하도록 만들었다. 대운하로의 물류 통합은 국가적 물류 체계인 조운(漕運)에서 해운을 금지하는 등의 결과로도 이어졌다.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대운하의 현재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은이는 대운하 시대 중국에는 하운(河運)과는 다른 해운(海運)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 곧 “바다와 해안을 침범하는 해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본다. 1572년 잠시 허용됐던 해도 조운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선박 전복 사고를 빌미로 곧바로 다시 금지된 사례, 왜구와 유럽 세력 등에 대해 중국 조정이 보였던 두려움 등 “해양 세계가 지닌 통제 불가능성에 대해 관료들의 뿌리 깊은 불신”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대운하 시스템이 기능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기에, 중국 조정은 연해 지역을 완전히 차단하는 대신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암묵적으로 밀무역은 허용하는 등 ‘선택적’ 해금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운하 시대를 관통하는 해양에 대한 중국의 태도를 굳이 하나로 묘사하자면 ‘통제 가능한 개방’이었다.” 중국이 해양 진출을 “주저”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다.
이 같은 주장은 “중국에는 땅이 넓고 물산이 풍족해(地大物博) 해양 진출의 동기가 적었다”는 기존 논의를 일부 뒷받침하기도 한다. 물산의 남북 이동이 가능해지는 등 대운하가 중국 내부에서 ‘균형 발전’을 유도하는 바람에 해양 진출에 대한 필요성이 적어졌을 수 있다는 얘기다. 300년이 넘도록 효율적으로 운영되던 대운하와 이와 함께 하던 밀무역 및 통제 받는 국제무역 시스템은 19세기에 이르러 모두 해체됐다. 그렇게 한동안 잊혀졌던 대운하는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일대일로’ 등과 연결되어 다시금 생명력을 얻고 있는 중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