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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산 사람은 살 수밖에 없다’는 논리

등록 2021-09-24 04:59수정 2021-09-24 09:13

관리자들
이혁진 지음 l 민음사 l 1만4000원

<누운 배>로 2016년 제21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가 이혁진(사진)이 세 번째 장편 <관리자들>을 내놓았다. 겨울 국도 옆 하수관 건설 공사장을 무대로 삼아,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부조리한 현실과 그 현실에 대응하는 인물들의 윤리적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다.

소설 들머리는 주인공인 현경이 모는 굴착기가 공사 현장 식당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이다. 식당 안에서는 건설사 현장소장과 작업 인부들이 떠들썩하게 회식을 하고 있는데, 현경의 굴착기는 왜 그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 소설은 인상적인 첫 장면이 빚어지기까지 저간의 사정을 되짚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회식의 배경으로 “죽은 선길의 건”이 언급되거니와, 선길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이 소설의 핵심을 이룬다. 20년 간 기업 회계 담당으로 일하다 그만둔 선길은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한편 생계 방편으로 노동 현장을 택했다. 일손이 서투르기만 한 그는 소장의 지시로 있지도 않은 멧돼지를 감시하는 야간 업무에 배치되었다가 공사 현장으로 복귀하지만,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안전수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사고 당시 다수의 인부들이 현장에서 술판을 벌였음에도 선길 자신은 그에 끼지 않고 묵묵히 제 일을 하던 중이었는데, 소장은 거꾸로 선길만이 술을 마시고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상황을 조작한다.

“선길인 갔어. 갔고 다시 못 와. 산 사람은 살 수밖에 없는 거고. 누가 얼마를, 뭘 받든 받지 않든.”

선길의 동료였던 늙은 노동자 목씨는 뒤바뀐 진실에 항의하는 현경에게 이렇게 변명한다. 인부들이 작업 중에 술을 마신 사실이 드러나면 회사는 당장 하수관 건설에서 손을 떼어야 하는데, 죽은 선길이 죄를 뒤집어쓰는 대신 유족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냐는 논리. “길고 시끄러워질수록 어차피 회사라는 데는 별 타격 없어”라고, 목씨는 자신을 포함한 동료 노동자들이 소장의 조작에 공모하게 된 까닭을 설명한다.

소장은 현경에게도 목돈을 건네며 목씨와 같은 논리로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 현경은 그의 ‘현실론’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다. “소장의 말은 견딜 수 없이 징그러우면서도 현실에 이를 맞춘 것처럼 딱딱 맞아 들어갔다.” ‘진실’이냐 ‘현실’이냐의 딜레마 앞에서 갈등하던 현경이 결국 현실 아닌 진실의 손을 들어준 결과가 소설 첫 장면이었던 것.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성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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