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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에밀리의 정원에서 발견한 펜과 모종삽의 관계

등록 2021-09-24 04:59수정 2021-09-24 09:36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
마타 맥다월 지음, 박혜란 옮김 l 시금치 l 2만원

“그녀는 ‘데이릴리’(원추리속 식물) 두 송이를 들고 와서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내 손에 꽃을 올려놓고는 말했소. ‘이건 제 소개예요.’”

훗날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집 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문인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스는 1870년 디킨슨을 처음 만난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몇 차례 ‘공포증’을 경험한 이래 삼십대부터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디킨슨은 히긴스를 ‘지도 교사’라고 부르면서도 10년째 편지만 주고받던 터였다. 히긴스는 이날의 만남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렇게 내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사람은 처음이었소.”

평생 흰 드레스만 입으며 가족 외 사람들과는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는 등의 결벽적 태도로 인해 디킨슨은 중세 신비주의자와 같은 풍모로 기억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작은 몸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품은 사람이었다. 평생 흙을 만지며 꽃과 나무를 가꿨고 이웃 아이들을 허물없이 대했으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꽃과 시와 초콜릿을 선물했다.

‘펜과 모종삽의 관계에 특히 관심이 많다 ’는 조경가이자 작가인 마타 맥다월은 이 에너지의 원천을 ‘정원’에서 찾는다. 미국 소도시 애머스트에 있는 디킨슨 생가를 방문하자마자, 문학의 비밀을 여는 열쇠는 이곳의 꽃과 나무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곤 애머스트 정원의 사계절을 묘사하면서 디킨슨의 시가 탄생한 장면을 추적해나간다. 초봄에 피어나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떠는 팬지, 늦은 봄 언덕을 파랗게 물들이는 버지니아 블루벨, 버팀대에 묶어주기 바쁘게 쑥쑥 자라나는 한여름철 허니 서클, 산들바람처럼 움직이는 아이리스…. 꼬마 시절부터 “나는 정원에서 태어났어 ”라고 말했던 디킨슨에게 꽃은 “흙의 연인”이었고, “입술은 없지만 언어를 지닌” 존재였다. 꽃에 대한 디킨슨의 사랑은 문학에 대한 태도와도 흡사했다. 청소년기에 식물학을 공부했던 디킨슨은 ‘압화’ 400여점이 담긴 식물표본집(허버리움)을 남겼는데, 이는 그가 남긴 시 묶음과 똑 닮았다. 꽃의 수술과 암술 개수를 적고 리넨 분류법에 따라 정리한 식물표본집은 수백편의 시를 우아한 필체로 정갈하게 정리해 묶어놓은 작은 책들을 연상시킨다. 디킨슨은 사랑은 모호하지만 사랑의 표현은 정확해야 한다고 믿었다. 식물과 운율의 질서에 삶을 송두리째 갈아 넣으며 행복했던 것은 그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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