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유은실 지음 l 비룡소(2021)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마냥 반갑지는 않다. 오래 묵은 가족 문제가 왕왕 터지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부모를 만날 때면 걱정이 앞선다. 버럭버럭 화를 내는 아버지와 쉼 없이 잔소리를 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면 앞으로 어쩌나, 나는 어떻게 늙어야 하나 싶어 마음이 어지럽다. 노년의 시간은 막연히 생각하듯 온화하거나 평화롭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고집과 회한과 분노와 서글픔 같은 감정이 뒤섞여 있다. 그러다 가끔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어른을 만나면 반갑다 못해 고맙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망해버린 가족을 구원하는 수림이와 순례 씨의 이야기지만 그 이상이었다. 순례 씨라는 멋진 할머니를 만난 것만으로도 값지다. 일흔다섯 살 순례 씨는 세신사로 일해 번 돈으로 ‘순례 주택’을 짓고 시세보다 싼 값으로 세를 놓아 다세대 입주민들과 어울려 산다. 오래 연애를 한 수림이 할아버지 부탁으로 수림이를 키웠고,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수림이는 제 피붙이보다 순례 씨와 둘도 없이 지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집에서, 할아버지의 돈으로 떵떵거리며 살던 수림이네 식구가 보여준 철없는 언행은 흔히 볼 수 있어 놀랍지 않았다. 굉장한 건 순례 씨였다. 순례 씨는 간단히 빨리 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 뿐 나물 반찬은 하지 않는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번 게 내 돈이 아니라 내가 벌어 내가 쓴 것만 내 돈이기” 때문에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꼭 이웃에게 쏜다.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남을까봐 고민이다. 썩지 않는 쓰레기가 될 물건은 사지 않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려고 스마트 티브이 작동 법을 어렵사리 배운다. 나도 딱 순례 씨만큼만 늙고 싶다. 나이 들면 새로운 것이 낯설지만 구박받아도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례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자식과 손주 자랑을 하느라 다른 노인과 경쟁하는 대신 조의금을 많이 내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여전히 시를 읽고 다른 이들에게 들려줄 줄 아는 노인이 되고 싶다.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데 순례 씨처럼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내 아이가 어릴 때 선배에게 ‘아이 문제’ 때문에 고민이라고 했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세상에 아이 문제가 어디 있느냐고, 실은 부모 문제라고 했다. 순례 씨도 “어른이 문제야. 애들이 어디서 배웠겠니? 어른들한테 배운 거지”라고 말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보호자가 필요하다. 보호자는 아이들을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일뿐 아니라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모방하며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나이 드는 것을 고민하는 어른뿐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이 꼭 순례 씨를 만나면 좋겠다. 진짜 어른을 봐야 제대로 된 어른으로 자랄 게 아닌가. 열세 살부터. 출판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