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에서 여성, 여성에서 사람으로 여성복 기본값 재설정 프로젝트
김수정 지음 l 시공사 l 1만4500원 환절기, 옷장과 서랍 안은 혼돈 그 자체다. 혼돈을 정돈하기 위해 가진 옷들을 최대한 다 볼 수 있게끔 옷장 문을 활짝 열고, 서랍장을 완전히 꺼냈다. 자, 어떤 옷을 퇴출할 것이냐.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대적인 기준을 하나 마련했다. 몸을 끼워 넣어야 하는 불편한 옷들은 모조리 내다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한두 벌 정도일 줄 알았는데 착오였다. 옷장 속 옷의 5분의 1은 퇴출함으로 직행했다.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를 읽기 전 일이다. 나는 왜 이렇게 불편한 옷을 이고 지고 살았던 것인가. 이 책을 읽고 의문이 풀렸다. 지은이는 여남 공용 옷 브랜드 ‘퓨즈서울’의 김수정 대표다. 그의 옷을 에스엔에스(SNS)에서 꾸준히 보아왔던 터다.(아직 사보지는 못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퓨즈서울의 옷을 꼽으라면 단연 슈트다. 여성 슈트를 온라인에서 검색하면 거의 결혼식 피로연 때나 입을 하얀색이나 분홍색 옷이 즐비하게 나오던 때였다. 그 사이에 퓨즈서울의 슈트는 색상부터 옷의 구조까지 ‘단단해’ 보였다.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여성복이 단단하지 않은 이유가 담겨 있다. 왜 여성 옷은 활동성이 아닌 ‘라인’을 기준에 놓는지, 세탁을 몇 번 하면 금세 뜯어지고 마는 블라우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유행이 되겠다 싶으면 거의 하루 만에 상점가를 뒤덮는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옷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속속들이 살핀다. 책 속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튼튼하려야 튼튼할 수 없는 게 지금의 여성복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김 대표는 ‘탈코르셋’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선택지를 주고 싶어 퓨즈서울을 만들었다고 했다. 책은 옷을 좋아하고, 탐구하고, 만드는 사람이 온전히 자신의 성별, 여성을 기준에 놓고 그 기본값을 탐색해 가는 과정을 살핀다. 더불어 탈코르셋 너머 여성 옷의 ‘기본 값’을 재설정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을 처음 알게 됐다는 지은이. 그는 이제 자신이 만든 옷에 자신이 이해하고, 전달하고 싶은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는다. 그의 메시지와 실천이 여성복의 판도를 ‘여성의 몸 그리고 삶을 존중하는’ 쪽으로 조금이나마 변화시키고 있다. 여전히 몸에 편하면서도 튼튼한, 제대로 된 여성복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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