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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파묵과 보낸 30년 번역은 즐거운 숙제

등록 2021-11-05 05:00수정 2021-12-03 14:50

[한겨레Book] 번역가를 찾아서
터키어 번역가 이난아

열정과 낙천주의로 똘똘 뭉친
터키어 통·번역계 일인자 이난아
30대 파묵 만나 14권 번역
터키 여성작가 시리즈 내고파
이난아 번역가는 인터뷰 3일 전에 대상포진 진단을 받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가 보네”라고 심상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가 몹시 열정적인 멀티플레이어이자 극심한 낙천주의자라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인터뷰를 하는 두 시간여 동안, 그는 1997년 아흐멧 알탄의 <위험한 동화>(황매, 2004)로 데뷔해 터키문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53권의 책을 한국어로 옮기고 천상병의 <귀천>을 비롯한 6권의 한국문학을 터키에 소개한 번역가로서의 삶을 들려주는 한편, 한국어를 전공한 터키 현지인 학생과 공동작업을 상의하고 얼마 뒤에 열릴 한국-터키 문학교류 행사의 사회를 맡기로 결정했다.

터키문학 전문 번역가인 이난아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어학과 교수를 지난 2일 자택에서 만났다. 타자기에 꽂힌 원고는 파묵이 만년필로 쓴 원고의 파지다. 파묵은 친구인 이난아 번역가에게 창작의 고통이 담긴 원고의 파지를 선물하기도 하고(처음엔 웬 쓰레기를 선물로 주나 했다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걸 상기하고 얌전히 챙겨뒀다고 한다), 스무 살까지 화가를 꿈꿨던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만날 때마다 이난아 번역가의 초상화를 정성껏 그려주기도 한다고.
터키문학 전문 번역가인 이난아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어학과 교수를 지난 2일 자택에서 만났다. 타자기에 꽂힌 원고는 파묵이 만년필로 쓴 원고의 파지다. 파묵은 친구인 이난아 번역가에게 창작의 고통이 담긴 원고의 파지를 선물하기도 하고(처음엔 웬 쓰레기를 선물로 주나 했다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걸 상기하고 얌전히 챙겨뒀다고 한다), 스무 살까지 화가를 꿈꿨던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만날 때마다 이난아 번역가의 초상화를 정성껏 그려주기도 한다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인 그는 학부와 대학원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 한국외대에서 진행하는 ‘특수어 진흥사업’ 일환으로 국내 중·고등학생에게 온라인 터키어 수업도 한다. 그뿐일까. 터키어 통·번역계의 일인자인 만큼 터키 국빈이 방문하면 한국 대통령과의 회담 자리에 배석해 통역을 하고, 터키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의 쇄도하는 강연요청을 거절하기가 바쁘다.

이 많은 일들을 즐기며 해온 것이 하루이틀이 아닌 만큼, 대상포진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오.르.한.파.묵. 이난아 번역가가 독점 번역하는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그와 30여 년 우정을 나눈 친애하는 벗 때문인 것이다!

“이 조그만 글자 좀 보세요. 무려 580쪽이에요. 감염병의 역사가 나오는 소설이라 의학용어가 많아서 공부를 엄청 해야 해요. 파묵은 매번 이렇죠. <내 이름은 빨강>(민음사, 2019) 때는 6개월 동안 세밀화를 공부했고 <내 마음의 낯섦>(민음사, 2017) 때는 그가 처음으로 페미니즘을 다뤘다기에 어떤 페미니즘 요소가 있는지 연구했어요. 덕분에 논문도 썼네요. 그러니 번역기간이 다른 작가의 두 배가 걸려요. ‘감염병 소설’이니까, 코로나가 끝나기 전에 책이 나와야 하는데!”

20대의 터키문학 번역가 지망생 이난아와 30대 청년작가 오르한 파묵의 첫 만남. 이난아 제공
20대의 터키문학 번역가 지망생 이난아와 30대 청년작가 오르한 파묵의 첫 만남. 이난아 제공

막바지 작업 중이니 내년 1월 초엔 꼭 출간될 거라며 두 주먹 꼬옥 쥐는 그의 눈가 다크서클을 짐짓 못 본 체하며 물었다. 오르한 파묵은 이난아 번역가에게 어떤 작가인가요? “파묵은 내게 번역가로서 최고의 기쁨과 영예를 가져다준 작가죠. 너무나 성실한 완벽주의자라 가끔 나를 지옥에 빠뜨리긴 하지만.”(웃음) 이난아 번역가는 터키 이스탄불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며 파묵을 처음 알게 됐다. 논문 주제가 ‘터키 문학에 나타난 동·서양 갈등 문제’였는데, 훗날 “고향인 이스탄불의 음울한 영혼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문화 간 충돌과 복잡함에 대한 새로운 상징을 발견한”(한림원,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이유 중) 작가로 평가받게 되는, 당시엔 30대 청년작가였던 파묵의 <하얀 성>(민음사, 2011)이 훌륭한 텍스트가 되어주었다. 뛰어난 작가를 발견했다는 기쁨에 출판사에 연락해 파묵을 처음 만났다.

오르한 파묵이 그린 이난아 교수. 이난아 제공
오르한 파묵이 그린 이난아 교수. 이난아 제공

“파묵 덕분에 저도 덩달아 부지런해졌어요. 그는 아침 9시에 작업실에 출근해서 오후 7시까지, 매일 에이포(A4) 기준으로 0.8매 분량의 글을 써요. 만년필로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거죠. 그렇게 3~4년에 한 편씩 장편소설을 출간하니까 저도 지금까지 파묵의 책 14권을 부지런히 번역해야 했죠.”(웃음)

우정은 때로 고통을 부른다. 예를 들어, 만연체가 특징인 파묵은 <이스탄불>(민음사, 2008)에서 4쪽이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역대급 장문을 구사한 적이 있다. 영문판은 여러 문장으로 나뉘어 번역돼 있었고, 고민하던 이난아 번역가는 ‘친구찬스’를 쓰기 위해 파묵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돼, 난아! 나누지 말고 꼭 한 문장으로 번역해 줘. 그러는 거예요. 했어요, 결국. 4쪽짜리 한국어 문장을, 말이 되게, 파묵 특유의 리듬감을 살려서 쓰는 게 어떤 일인지는 말로는 설명 못해요.”

오르한 파묵의 2014년 모습. 이난아 제공
오르한 파묵의 2014년 모습. 이난아 제공

파묵과의 작업이 워낙 고단해서 사바하틴 알리와 아지즈 네신 같은 유수의 작가들을 번역하는 것이 휴식처럼 느껴졌다는 이난아 번역가는 “앞으로 터키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해서 시리즈로 출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번역한 작품 53권을 모두 손수 골라왔다. “번역을 통해 새로운 작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재미에서 헤어나기 힘들 것 같다”는 그에게 번역은 즐거운 숙제요, 친구다. 마치 파묵처럼.

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검은 책
오르한 파묵 지음, 민음사(2014)

이난아 번역가가 자신이 옮긴 14권의 파묵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애정하는 작품. 국내에선 덜 알려져 안타까웠는데,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 수상 당시 함께 후보에 올랐던 파묵의 작품 중 <검은 책>을 언급해 위로가 되었다”고.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학고재(2017)

1943년에 출간된 터키 고전.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작가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정치적 탄압을 받아 출간 당시 주목받지 못하다가 입소문으로 알려졌고, 70여년 만인 2017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 야느크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 야느크 지음, 현대문학(2014)

“러시아 작가들이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면, 터키 작가들은 모두 사이트 파이크의 우산 아래서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터키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의 단편선집. “읽는 순간 전율을 느낄 정도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
아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문학동네(2007)

17세기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꿈, 환상, 진실을 쫓는 모험을 그린 작품. 아흐산 옥타이 아나르는 파묵과 함께 당대 터키를 대표하는 작가다. 이난아 번역가는 “파묵의 추천으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됐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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