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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성별, 나이차 극복한 두 ‘문청’의 우정

등록 2021-11-12 05:00수정 2021-11-12 10:38

황광수·정여울 ‘마지막 왈츠’
2인 독서토론으로 ‘향연’ 마련
황광수의 마지막 날들 기록

마지막 왈츠
황광수·정여울 지음 l 크레타 l 1만5000원

44년생 남성 문학평론가 황광수(사진)와 76년생 여성 작가 정여울이 나눈 문학적 우정을 기록한 책 <마지막 왈츠>가 나왔다. 사진 이승원 제공
44년생 남성 문학평론가 황광수(사진)와 76년생 여성 작가 정여울이 나눈 문학적 우정을 기록한 책 <마지막 왈츠>가 나왔다. 사진 이승원 제공

전라남도 완도 출신의 1944년생 남성 문학평론가 황광수와 서울 출신의 1976년생 여성 작가 정여울. 32년의 나이 차가 나는데다 학연이나 혈연으로도 엮이지 않은 두 문인이 특별한 우정을 일구었다. 두 사람의 이름으로 함께 나온 <마지막 왈츠>는 그 우정의 기록이자, 지난 9월29일 작고한 황광수의 마지막 흔적을 담은 다큐멘터리로도 읽힌다.

얼핏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의 우정은 플라톤의 ‘향연’을 본뜬 2인 독서 토론 모임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그에 앞서 두 사람은 같은 문학 계간지의 편집위원으로 처음 만났고, “만나자마자 절친이 되었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별의별 비밀을 다 털어놓는 친구가 되었다.” 잡지 편집위원을 그만둔 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향연’을 시작했다. 서로가 추천한 책을 읽고 매달 한두 번씩 만나 그 책들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향연> <파이돈>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 같은 책들이 매개가 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글과 말을 통해 전후세대의 트라우마를 이해할 수 있었고, 선생님은 나의 글과 말을 통해 여성의 시각과 나의 세대의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정여울)

<마지막 왈츠>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정여울이 묻고 황광수가 답한 2013년의 인터뷰, 그리고 황광수가 짧은 시 형식으로 쓴 에세이로 이루어졌고, 책의 앞과 뒤에는 정여울과 편집자 이승원이 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추억담 등이 배치되었다. 두 사람이 향연을 펼치고 이 책을 준비하던 최근 몇 년간은 황광수가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여러 차례 큰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던 시기와 겹친다.

44년생 남성 문학평론가 황광수와 76년생 여성 작가 정여울(사진)이 나눈 문학적 우정을 기록한 책 &lt;마지막 왈츠&gt;가 나왔다. 사진 이승원 제공
44년생 남성 문학평론가 황광수와 76년생 여성 작가 정여울(사진)이 나눈 문학적 우정을 기록한 책 <마지막 왈츠>가 나왔다. 사진 이승원 제공

“여울아, 이제는 그냥 이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어. 이제는 더 바랄 게 없어. 그런데 너와 약속한 그 책만은, 꼭 마치고 떠나고 싶었는데.”

황광수가 정여울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털어놓은 데 이어 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편집자가 서둘러 원고를 정리해 출판사에 넘겼을 때, 황광수의 영면 소식이 들려왔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반은 고아인 채로 세상에 나온 책을 들고 정여울과 편집자는 그들이 생전의 황광수와 같이 갔던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의 사르트르-보부아르 무덤을 찾아 책을 놓고 ‘인증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왈츠>에는 황광수가 2014년 정여울과 함께 몽파르나스 무덤을 둘러본 뒤 쓴 글도 실려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합장된 대리석 묘지도/ 쏟아지는 참배객들의 눈길 아래 연분홍으로 물들어 있다./ 시차를 달리한 방문객들이 남겨놓은/ 꽃다발들(어떤 것들은 벌써 뭉크러져 바닥에 달라붙고 있다),/ 사이사이에 기차표와 비행기표들,/ 그리고 편지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머리맡 넓은 입석에 음각된 그들의 이름 주위에는/ 빨간 입술 자국들이 장미 꽃잎들보다 더/ 가볍고 화려하다.”

<마지막 왈츠>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여럿 나온다. 가령 지난 2월 정여울이 미하엘 엔데 소설 <모모>에 관한 글을 <한겨레>에 실었을 때, 항암치료를 받느라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아침 일찍 종이신문으로 그 글을 읽은 황광수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장문의 독후감을 정여울에게 보낸다. 오전 7시38분에 발신된 그 문자 메시지의 첫머리는 이러하다.

“여울아, 네가 오늘 쓴 글, 참 아름다운 글이다. 글에 담긴 이야기, 배치와 짜임새까지 너다운 의미와 느낌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네 글은 봄바람처럼 싱그러운 향기를 풍긴다.”

2014년 여름, 황광수와 정여울과 편집자 이승원이 함께 두 달간 유럽을 여행했을 때, 이들은 한 달 남짓 찍은 1만 컷의 사진이 저장된 노트북 컴퓨터와 지갑, 휴대폰을 몽땅 도둑맞고 잔뜩 낙담한 상태로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한다. 관광객들로 붐비던 파르테논 신전을 거쳐 무더위 속에 한참 헤맨 끝에 마침내 인적이 전혀 없는 디오니소스 극장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유럽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소 중 하나가 그곳이라며 기쁨을 표하고자 황광수가 펼친 세리머니는 어떤 것이었을까. 힘차게 팔굽혀펴기 열 번 하기! 황광수가 온몸으로 표현한 기쁨은 곧 나머지 두 일행에게도 번져서 세 사람은 이내 낙담을 떨쳐낼 수 있었고, 나중에 정여울은 황광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인생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시간이 다시 오기 어렵다는 것을, 이제야 저는 뒤늦게 깨닫습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찬란한 추억의 불꽃, 그 중심에 ‘우리들의 디오니소스 극장’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황광수의 아픈 가족사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였던 부친은 장남의 이름을 민중과 벗한다는 뜻을 지닌 ‘우민’(友民)으로 지었고, 그 형은 소년 빨치산이 되었는데 아마도 산에서 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린 황광수는 아버지 대신이었던 형을 생각하며 “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았다.” 황광수의 나이 여섯 살 때 가족은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났고, 그는 그로부터 무려 56년 뒤에야 고향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역사와의 연관성을 서술하는 것이 비평이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고수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비평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것은 그런 아버지와 형에 대한 도리였을 것이다.

정여울과 황광수는 “문학을 통해 친구가 되었고,” 둘 다 ‘평생 문학청년’을 자처했다. 황광수가 어느 시집에 자신이 쓴 해설을 불만족스러워하는 마음을 드러낸 에세이를 보면 그의 문청 기질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느낌이 끌어올라 정신을 어지럽혔다. 사람의 말을 잃은 구렁이가 되고 싶었다.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깊은 어둠 속에 있고 싶었다! (…) 파도를 타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서퍼들처럼, 중심은 단단하되 가볍게 날아오르는 글을 쓰고 싶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정여울 작가가 2014년 황광수와 함께 여행했던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의 사르트르-보부아르 묘지에 자신들이 함께 쓴 책 &lt;마지막 왈츠&gt;를 올려 놓고 지난 10일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정여울 제공
정여울 작가가 2014년 황광수와 함께 여행했던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의 사르트르-보부아르 묘지에 자신들이 함께 쓴 책 <마지막 왈츠>를 올려 놓고 지난 10일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정여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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