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을 죽여야 원문이 사는 역설의 번역론
이희재 지음 l 교양인 l 1만6800원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을 노래한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는 이런 글을 남겼다. “Poetry is what is lost in translation.” 시는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 시란 번역하면 사라진다, 따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시와 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번역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요 번역에 불가피한 한계를 지적하는 경구다. 인공지능 번역 시대라고 달라진 게 있겠는가. <번역의 모험>을 보면, 훌륭한 번역은 외국어 실력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그 이상의 한국어 능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번역가에게 유용하겠지만 번역가가 아니어도 외국어투가 짙게 스며들어 뒤틀리고 변질된 한국어를 새삼 들여다보게 하는 흥미로운 결과물이다. 30여년 번역에 매진해온 저자는 ‘문턱’을 거듭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쉼표와 띄어쓰기다. 한국어에는 원래 없던 쉼표와 띄어쓰기가 도입된 것은 문턱을 낮추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직업적 글쟁이를 비롯해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띄어쓰기는, 한국어뿐 아니라 유럽어에도 없는 기호다. 애초에 글보다 말이 앞섰던 터에 글의 중요성이 커지고 낭독에서 묵독으로 옮겨가며 쉼표가 등장하고 확산한다. 한국에도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띄어쓰기가 적용된다. 대중 독자가 글의 의미를 정확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띄어쓰기도 쉼표도 도입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띄어쓰기가, 특히 한국어의 경우 법칙보다 예외가 많아 골치를 썩이는 띄어쓰기가 도리어 문턱을 높이고 있다. 쉼표도 필요 이상으로 남발되며 문턱을 낮추는 기능이 상실됐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밖에도 저자는 모으기, 찌르기, 흘려보내기, 맞추기, 낮추기, 살리기 등으로 이름 붙인 각 장을 통해 번역하는 과정에서 부사가 제자리를 찾고 주제조사를 적절히 써야 하며 원문보다 뜻을 살려야 하고 운율을 살리고 허세와 권위를 버려야 한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저자는 다채로운 예시를 통해 이해를 돕는다. 영어 공부도 되거니와 한국어 공부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예컨대 부사를 동사 곁에 두지 않음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키우는 사례는 무릎을 치게 한다. 이 기사를 쓰면서도 저자의 지적이 쉴새없이 떠오른다. 저자의 지적에 특히 큰 박수를 친 대목이 있다. “띄어쓰기 원칙은 쉽고 명쾌하고 유연해야 합니다.” 지금 띄어쓰기는 어렵고 명쾌하지 않다. 제발.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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