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세기 유럽지식인 연대·교류
서지학 창시부터 베이컨·케플러까지
개방적 담론 통해 고대 유산 극복
구글 시대에도 도서관 가치 소중
서지학 창시부터 베이컨·케플러까지
개방적 담론 통해 고대 유산 극복
구글 시대에도 도서관 가치 소중
요하네스 묄시우스의 <아테네 바타베>(1625)에 담긴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 도서관 모습. 르네상스 시대에 페트라르카에 의해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스토아철학은 네덜란드 문헌학자 유스투스 립시우스에 의해 그리스도교 사상과 융합되었고, 그의 저술들은 르네상스 신스토아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립시우스가 타키투스를 연구하던 작업본은 레이던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도서관 소장. 21세기북스 제공
세상의 모든 지식을 연결한, 가장 은밀하고도 위대한 연대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 강주헌 옮김 l 21세기북스 l 3만8000원 오늘날 지식은 어떻게 만들어져 어떻게 확산하고 어떻게 공유될까? 바로 떠오르는 것은, 구글이다. 월드와이드웹의 세계에서 못 찾을 지식과 정보는 없다. 오죽하면 ‘구글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들 한다. ‘디지털 시대 가장 눈에 띄는 신전’이라고도 구글을 표현한다. 구글은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과연 인류는 과거보다 더욱 지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을까? <편지 공화국>은 지식 공동체가 꽃피운 16~18세기 근대 유럽 지성의 역사를 추적한다. 교통도 통신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상과 이론, 지식과 지성이 자유롭게 흘러다니고 뒤섞이고 넘나들었다. 그 가운데에는 편지와 출판물이 있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뤄진 지식인들의 공화국은 국경 없는 국가였다. “자연과 역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지적이고 사회적인 조직망 이상의 존재였다.” 지적 교류는 대단히 밀도 있게 이뤄졌다. 당시 유럽 학자들은 국경을 뛰어넘은 연대를 통해 열정적으로 지식을 교류하며 탐구했고 과거 문헌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을 통해 지식 혁명의 길로 나아갔다.저자는 르네상스 학자인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1462∼1516)부터 따져본다. 베네딕트회 수도원장이자 애서가였던 트리테미우스는 도서관을 다양한 책으로 채워 20대에 명성을 얻고 30대에 유럽에서 가장 혁신적인 역사학자가 된다. 트리테미우스는 수도사로서 신학과 성경 연구서뿐 아니라 인문학적 교양 서적까지 백과사전식으로 수집했다. 곳곳의 수도원을 찾아다니며 천문학과 음악, 수학, 역사, 이학 등을 망라하여 책을 구입하고 필사본을 교환했다. 라틴어만이 아니라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된 책들도 두루 갖췄다. 비록 그는 40대에 수도원에서 쫓겨나고 이후 자료를 조작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지만, 서지학 창시자로서 편지 공화국 시민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저자는 트리테미우스의 삶과 학문의 궤적을 쫓으며 그의 사상적 흐름을 짚어낸다.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에도 주목한다. 저자는 그에게서 ‘지식 프로젝트 팀’의 탄생을 보았다. 베이컨은 새로운 유형의 학문이 필요하다고 보고 전통적 유형의 이론이 아니라 활용 가능한 지식, 즉 “자연계를 지배하는 힘을 주는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학제 간의 공동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의 미완의 유토피아 소설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저자는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베이컨은 이 소설에서 “지적 작업을 위한 새로운 환경”을 이상적으로 묘사하여 고안하는 데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들이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습까지 상상했다.” 지식인들은 빛의 상인, 약탈자, 수수께끼 인간, 개척자 혹은 광부 등으로, 세분한 역할에 따라 분류된다. 이는 곧 과학 연구기관의 청사진으로 볼 수 있는데, 베이컨이 이 소설을 쓰기 반세기 전에 이미 유럽에서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동작업이 이뤄졌다. 이는 인문주의의 구상과 실천으로서의 17세기 편지 공화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는 천문학이나 점성술로 유명하지만 평생 과거 사건을 재구성하며 역사적 시기를 규명하는 연대학을 연구했다. 케플러는 전형적인 연대학자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에도 이미 상당한 결과를 내놓던 학제간 방법론을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그는 “유대 국가의 몰락과 기독교의 탄생을 다룬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역사적 자료들과 싸”웠고 여러 신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특히 현재는 12월25일로 정해두고 지키는 예수 탄생일을 둘러싸고 가톨릭과 천문학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지는데, 케플러와 연대학자들은 편지 공화국 구성을 시도한다. “칼뱅교도와 루터교도와 가톨릭교도가 예수의 행적과 관련된 날짜를 차분하고 건설적으로 토론하는 가상의 세계를 세우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구성된 편지 공화국에는 “수준별로 네트워크가 공존하며 다양한 유형의 계급 구조와 충돌했”고 “편지 공화국의 지리적 범위는 무척 넓었지만 (…) 편지는 국경을 쉽게 넘나들었다.” 이처럼 편지 공화국은 개방적 담론 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서 ‘공공성’이 도출되고 오늘날 시민사회가 자리잡을 터전이 마련됐다. 트리테미우스가 창시한 서지학을 바탕으로, 베이컨이 주목한 관찰과 실험을 도구 삼아, 케플러가 시도한 지적 네트워크를 통해 편지 공화국은 고대의 지적 유산과 맞서 싸웠다. 이를 통해 과학과 기술이 통합되고 유용한 지식이 양산되며 근대 산업 문명이 도래할 조건이 주어진다. 인류 역사상 학문적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근대 유럽에 견줘 오늘날은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저자는 1960년대 미국 가정을 거론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기자였는데,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간했을 때 인터뷰를 요청했다가 거절 당한다. 당시 저자는 부모의 식탁 대화 등을 통해 아렌트의 책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과 사회적 논란을 목격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때와 같은 “진지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람들의 진지한 대화”, “복잡한 세계와 역사를 처음으로 만나는 통로”는 사라졌다. 구글 제국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포괄적으로 색인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지만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는 “인간의 손이나 정신이 닿지 않는 텍스트를 세계의 독자들에게 쏟아내는 거대한 소방호스”일 뿐이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책의 미래는 암울할 터이지만, 저자는 디지털 자료가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도서관만이 내놓을 수 있는 종이책과 필사본, 고문서의 가치는 여전하다고 강조한다. 지식사학자인 저자가 근대 유럽의 문화사와 지성사를 이 책에 펼쳐놓은 까닭이기도 하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