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16일 오후 수원 반달공원 인근 카페에서 만난 전대호 번역가는 시인이자 철학가, 번역가로서 그의 삶과 일을 이야기했다. 5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고대 그리스에서 헤겔에 이르는 ‘알기 쉬운 서양철학사 강의’라 할 만했다.
그는 시인이다. 문학소년이던 십대 시절부터 1993년 <상처>라는 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하고 <지천명의 시간>이라는 시집 출간을 앞둔 지금까지, 단 하루도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다. 1990년대 후반, 독일 쾰른대에서 유학 중이던 전대호 번역가는 어느 밤 꿈에서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어머니를 만나고 귀국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독일어에 그만큼 익숙졌다는 얘기니까 유학생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이러다 우리말로 좋은 시를 쓰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불안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독일인들만큼 할 수 없는 외국어 때문에 우리말에 대한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죠.” 청소년기부터 한 주에 두 편 이상 꾸준히 시를 써온 그가, 독일에선 한 달에 한 편 쓰기가 버거워진 것도 염려를 부추겼다. 시에 대한 그의 갈망은 이토록 오래고 깊다.
그는 형이상학 철학자다. 서울대 물리학과 재학시절부터 철학대학원 진학을 위해 철학수업을 청강하는 그에게 ‘드디어 물리학을 전공한 걸출한 과학철학자가 탄생하는 것이냐’며 주목하던 주변의 기대를 단숨에 저버리고 ‘헤겔의 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독일 철학계의 거목인 클라우스 뒤징 교수의 가르침을 받아 헤겔의 ‘양적 무한’에 대한 논문을 쓰던 중, 문득 “신내림 받은 무당처럼, 벼락같은 철학적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는 이미 철학자였다. 스승이 곁에 없어도, 대학에 머물지 않아도, 학위가 있든 없든, 그는 자신이 평생 철학하는 사람으로 살 게 될 것을 알았다.
2001년 독일에서 돌아온 그는 영어와 독일어를 아우르는 과학·철학 전문 전업 번역가가 되었다. 마침 2000년대 초반 출판계에선 대중과학서들이 각광받는 참이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현대철학소사>(현대미학사, 1995), <슈뢰딩거의 삶>(사이언스북스, 1997) 등 철학 관련 영어원서를 번역해 출간한 경험이 있던 그에게 출판사들의 번역 의뢰가 쏟아졌다. 이후 전대호 번역가는 “일일이 세어보지 않았으나 150권보다는 많고 200권에는 좀 못 미치는” 영어·독일어 과학서와 철학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돈도 벌고 재미도 있어서 신나게 일하다 보니” 국내 대중과학서 시장을 함께 일궈온, 20여 년 관록의 번역가가 됐다.
“번역가는 연주자예요. 같은 베토벤을 연주하더라도 해석이 저마다 다르고 관객이 받는 감동의 포인트가 다르듯이, 번역가도 자신만의 연주를 통해 독자와 만나는 거죠. 그래서 저는 같은 책을 여러 명의 번역가가 다양하게 번역할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또 백건우 선생님 같은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동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연주를 결코 무시하지 않듯이, 초보 번역가의 해석도 충분히 존중되고 다양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번역에 대한 이런 생각은 “칸트와 헤겔에 많이 기댄 나름의 철학에서 일종의 다원주의적 실재론을 화두로 붙들고 있는”(장하석 교수와 주고받은 이메일 중) 철학자로서 그의 고민과 닿아있다. “너는 네 길을 가고, 나는 내 길을 가지만 조금 힘들 뿐이지 우리는 소통이 가능해. 이런 다양성, 다원주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철학을 못해요. 번역은 본질 자체가 ‘소통’인 작업이고요.”
3년 전부터 과학서를 줄이고 철학서 번역에 집중하고 있는 그는 올해 “번역가로서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세계적인 과학철학자인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의 <물은 H2O인가?>(김영사, 2021)와 ‘21세기 신실재론자’로 불리는 독일철학계의 신성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생각이란 무엇인가>(열린책들, 2021)를 번역하면서 ‘당대를 살아가는 철학적 동지’를 만난 기쁨을 한껏 만끽한 것이다. 특히 장하석 교수와는 이메일로 직접 소통하면서 “철학자로서, 번역가로서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보냈다.
늘 그래왔듯, 오늘도 오전에는 영어(마크 험프리스의 <더 스파이크>), 오후에는 독일어(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이 시대의 도덕적 진보에 관하여>) 책을 동시에 번역 중인 전대호 번역가의 장기 프로젝트는 그의 영원한 스승, 헤겔의 <정신현상학> 시리즈를 완역하는 것이다. 총 5편 가운데 첫 1권이 2019년 “일상적인 순우리말을 활용한 파격적 번역 시도”라는 평을 받으며 출간된 상태다. 그는 “다음다음 올림픽까지는 꼭 마무리해 보겠다”며, 문학소년처럼 맑게 웃었다.
글·사진/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유클리드의 창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까치(2002)
전대호 번역가가 과학 전문 전업 번역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며 펴낸 첫 책. 유클리드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기하학의 역사와 위대한 발견의 장면들을 이야기 들려주듯 알기 쉽게 풀어쓴 기하학 입문서로, 국내에서도 꾸준히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다.
미하엘 콜하스의 민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부북스(2011)
브란덴부르그의 말 장수 미하엘 콜하스가 자신이 겪은 부당한 일을 고발하려다 좌절하고 사적 복수를 시도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 전대호 번역가가 옮긴 많지 않은 독일 문학작품 중 하나로, “1800년대 소설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슈테판 클라인 지음, 청어람미디어(2014)
세계적인 과학자 13인의 인터뷰를 엮은 책. 과학자들이 말하는 자신의 삶, 그들이 생각하는 존재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지는 이 책을 통해 전대호 번역가는 “과학은 인간의 일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물은 H2O인가?
장하석 지음, 김영사(2021)
세계적인 과학철학자인 장하석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가 과학사-과학철학으로 풀어낸 화학적 ‘물’ 이야기. 전대호 번역가에게는 “저자와 모국어로 소통하며 작업하는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이자, 철학적으로도 많이 배우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