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역사 수메르
국내 최초 수메르어 점토판 해독본
김산해 지음 l 휴머니스트 l 3만3000원
인류가 기록한 ‘최초의 역사’는 수메르에 있다. 수메르는 8500여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발원했던 문명이다. 이들의 역사는 기원전 3000년대 말기께부터 넓적하게 만든 점토판에 갈대 첨필로 그린 상형문자로 기록되었고, 나중에는 찍어 눌러 기록하는 설형(쐐기)문자로 기록됐다.
<최초의 역사 수메르>는 고대어를 깊이 연구해온 한국인 학자 김산해(1959~2021)가 수메르 점토판으로부터 직접 읽어낸 내용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수메르문명의 역사다. 지은이는 앞선 2005년 수메르어 점토판 원문 등을 직접 해독해 수메르의 전설적인 왕에 대한 무훈담 ‘길가메시 서사시’를 소개한 책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펴낸 바 있다. 이번에는 전 세계 18개 박물관에 보관된 수백 장의 점토판을 연구해, 수메르문명을 시간 순서에 따른 통사로 재구성했다. 지난 13년 동안 자료 수집과 원고 집필에 매달린 지은이는 세 차례 시한부 선고를 받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끝내 이 책의 출간을 지켜보지 못하고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지은이는 여는 글에서부터 “역사왜곡으로 잃어버린 수메르 역사를 복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수메르문명의 역사를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료로는 <길가메시 서사시>와 함께 <수메르 왕명록>이 꼽힌다. 기원전 1817년 ‘이씬’ 왕조의 필경사 누르-닌슈부르가 ‘에리두’부터 이씬까지 왕권의 이동을 기록한 <수메르 왕명록>은 수메르 역사를 “세계 역사의 맨 앞자리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지은이는 1877년 프랑스의 에르네스트 드 사르제크가 발굴한 ‘라가시’ 유적에서 나온 점토판들의 내용을 토대로, <수메르 왕명록>은 ‘역사왜곡’의 기록이라고 지적한다. 라가시 점토판은 기원전 2600~2334년 사이 벌어진 라가시와 ‘움마’ 사이의 전쟁을 ‘에덴전쟁사’로 기록하고 있는데, <수메르 왕명록>에는 아예 라가시와 움마의 기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르곤의 아카드 건설 과정이 기록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인류고고학박물관에 보관된 점토판. 휴머니스트 제공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보관된 점토판의 해독 내용. 부동산을 갈취하는 권력자의 폭정이 기록되어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시작한 수메르문명은 여러 도시국가가 경합하는 문명으로 발전했는데, 남동쪽에 자리한 라가시와 북서쪽에 있던 움마는 비옥토인 ‘에덴’을 차지하기 위해 250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최후의 승자는 움마였는데, 정작 그 결실은 수메르 전역을 지배하게 된 아카드인 사르곤이 차지했다. 그 뒤 수메르인은 181년 동안 아카드 왕들의 압제에 시달리는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결국 해방과 통일 과정을 거쳐 우르 3왕조가 이뤄졌으나, 우르 왕들에게 시달리던 ‘자그로스 종족 동맹군’의 공격으로 수메르는 기원전 2004년께 멸망하고 만다. 수메르의 멸망을 재촉했던 아카드인의 이씬 왕조가 수메르 멸망 뒤 우르를 차지했는데, 지은이는 이 이씬 왕조가 거짓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수메르 왕명록>을 개작하며 라가시 등의 역사를 지우고 우르 3왕조 뒤에 이씬 왕조를 이어붙이는 식의 역사왜곡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과거사 청산’은 ‘최초의 역사’에서부터 결정적인 문제였던 셈이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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