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가 없는 나라: 경계 밖에 선 한반도화교 137년의 기록
이정희 지음 l 동아시아(2018)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것처럼 오랫동안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써야 했다. 짜장면이 표준어가 된 것은 2011년 국립국어원이 표준어 규범과 실제 언중이 사용하는 말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을 감안해 짜장면도 표준어로 인정한 결과다. 중국어로 짜장면은 ‘작장면’(灼醬麵)이라고 쓰고, 이를 발음하면 ‘자장미엔’인데, 표준어 표기와 무관하게 우리는 오래 전부터 ‘짜장면’이라 불렀다. 인천 사람들은 짜장면을 비롯한 중국 요리에 은근한 자부심이 있다. 타지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고급음식점에서 먹는 짜장면이나 중국요리와 비교해도 인천은 어딜 가든 보통 그 정도쯤은 한다는 이야기를 곧잘 나눈다. 그 배경에는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있고, 짜장면의 최초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이정희 선생의 <화교가 없는 나라>를 읽다보면 이런 자부심에 약간의 흠집이 생긴다. 짜장면의 최초 발상지가 인천의 공화춘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며 공화춘 이전에도 이미 인천과 서울에는 다른 중국음식점들이 영업 중이었다는 것이다. 닭강정으로 유명한 인천 신포국제시장에는 중국 상인이 일본인 손님에게 푸성귀를 팔고, 조선인 아낙이 신기한 듯 채소를 들어 살펴보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개항기에 문을 연 신포시장에는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낯설었던 양파, 양배추, 당근, 토마토, 시금치, 우엉, 완두콩, 부추 같은 채소를 파는 화교 상점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이런 푸성귀들은 대부분 화교가 들여온 것이다.
인천 답동에는 성공회 강화성당과 함께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하나인 답동성당이 있다. 1890년대에 세워진 이 성당은 프랑스 출신 신부가 설계했지만, 실제로 건설한 것은 화교 건축기술자와 직공들이었다. 서울 명동성당, 전주 전동성당, 대구 계산성당 등 한국에서 근대 벽돌조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건축물 대부분이 동일한 경로를 밟았다. 중국 민족해방운동에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이 동참했던 것처럼 이 땅의 화교들 역시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화교 4명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화교배척사건이 있었다. 1927년 익산에서 벌어진 화교습격사건과 <조선일보>의 ‘만보산사건’ 오보가 빌미가 되어 일어난 1931년의 화교 배척으로 백주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이 불타고, 화교를 구타하고 학살하는 사건이 수일에 걸쳐 전국적으로 400여 차례 넘게 벌어졌다.
종종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가 실패한 나라”란 말을 듣게 된다. 우리는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공정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하지만, 정작 이 땅의 화교가 처한 거주 자격과 영주권, 참정권 등 법적 지위에 대해 논의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거의 없다. 비록 지난 1999년에 철폐되긴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제정된 외국인토지법으로 이들에게 재산상의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천하통일을 이루었던 재상 이사는 진시황에게 간언하길 “태산은 단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높은 것이며,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렇게 깊은 것”이라 했다. 중국의 자장미엔이 한국에 와서 짜장면이 되고, 중국의 푸성귀가 한국인의 밥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이 땅에 온 사람들을 해불양수(海不讓水)의 정신으로 품을 수 있을 때, 우리의 미래도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