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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딸만 ‘낙태’했다, 그 아이들이 다 태어났다

등록 2022-02-11 04:59수정 2022-02-13 10:20

성비 불균형 최악의 해 1990년
지워진 여자아이들 사는 가상세계로
“새 이야기는 내 삶에서 시작될 거야”
90년대생 2030 여성과 겹치는 목소리
성비 불균형이 정점을 찍은 1990년에 자행된 여아 ‘낙태’를 모티프로 첫 장편소설을 펴낸 황모과 작가. 그 여아들이 모두 태어난 가상세계를 구축했다. “우리가 지워진 이 나라에서. 이제는 아무도 잊히지 말자. 우리가 끝낼 때까지.” 문학과지성사 제공
성비 불균형이 정점을 찍은 1990년에 자행된 여아 ‘낙태’를 모티프로 첫 장편소설을 펴낸 황모과 작가. 그 여아들이 모두 태어난 가상세계를 구축했다. “우리가 지워진 이 나라에서. 이제는 아무도 잊히지 말자. 우리가 끝낼 때까지.” 문학과지성사 제공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황모과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4000원

“남아 선호 사상… 그게 도대체 뭐지? 여아 불호 사상이랑 같은 말 아니야? 여자아이들만 골라서 제거하는 일에 사상 같은 말을 붙여도 되는 거야?”

1990년의 재난을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임신중지라는 개념도 모르던 시절, 여아를 골라 ‘낙태’하는 “집단 학살”이 극에 달한 해. 출생 성비 불균형이 여아 100명당 남아 116.5명으로 최악을 기록한 해. 딸들은 소리 없이 지워졌고, 세상은 내내 조용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딸은 원래 없는 존재였다는 듯.

이 기괴한 정적을 찢는 강력하고도 유례없는 상상력이 등장했다. 1990년에 태어나지 못한 여자아이가 모두 태어난 세상이 있다면?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과 2021년 에스에프(SF)어워드를 받은 황모과가 첫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펴냈다. “서태지·자우림 세대”라는 그는 어떻게 1990년생 엠제트(MZ)세대 이야기를 쓰게 되었을까. 황 작가는 <한겨레>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피해자인 척하는 “일부 남성들의 염치없음”이 작품 구상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남아 출생수가 많아 여자 짝꿍도 없었고 앞으로 결혼도 어려울 거라고 마치 피해를 입은 것처럼 언급하는 (온라인) 게시물을 보고 충격을 먹었어요. 같은 시공간에 있었던 누군가는 생의 기회를 얻지도 못했는데, 집단적 죽음 사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어떤 무례함은 그 자체로 특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어야만 했던 존재에게 “누구 하나 사과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미안했다고 뻘쭘하게라도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시 부모님이라면 저보다 윗세대이긴 한데 나라도 해야 하나? 사과받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그럼 그 사람들을 불러오자. 이런 심정으로 소설 속 풍경을 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라진 이유를 알기도 전에 잊혀가는 여성들

1인칭 화자는 1990년생 ‘채진리’. 제빵사 아빠가 가족인 고등학생이다. 엄마는 진리가 태어난 날 돌아가셨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지만 “엄마 기일이 내 생일인 바람에 나는 엄마의 삶을 물려받은 것만 같다.” 아빠가 만든 슈크림크루아상, 친구들과 먹는 떡볶이를 좋아하는 진리의 평범한 일상이 산산조각 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너, 누구야?” 2학년 개학 날 교실에 들어선 진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 아는 친구들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있던 것이다. 특히 진리의 남자친구 ‘훈우’는 진리가 자신의 여자친구라는 것조차 모른다. 위로 셋이나 있을 뻔한 누나들을 “대신해서” 태어났으니, 누나들이 자신을 봤을 때 최소한 억울하지 않도록 살고 싶다던 그 훈우가 아니다. 남자애들은 완전히 다른 기억의 세계에 있다. 다행히 서로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남아 있었다. 여자 친구 ‘해라’도, 여장을 좋아하는 남자아이 ‘예준’도. 다른 세계의 그 남자들이 “우리”에게 말한다. “여기는 너희가 설칠 세상이 아니야.”

나쁜 변화가 계속됐다. 여자아이만 하나, 둘, 그러다가 “뭉텅뭉텅”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면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나오고, 메신저 목록에선 친구를 찾을 수 없고, 메일은 반송되고, 심지어 같이 찍은 핸드폰 사진도 사라져 있다. 집에도 찾아간다. “지연이네 엄마가 인터폰으로 말하더라고. 자기한텐 딸이 없다고…”.

여자아이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이유를 알기도 전에 잊혀가고 있었다.” 결국은 해라도 예준도 “투명하게” 사라지고 만다.

교실에 여자아이는 열 명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자애들만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곧 자기에게 닥칠 문제로 상상할 수 있는 사람만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진리가 태어난 가상세계 속 교실은 오늘날 현실세계를 똑똑히 반영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이중적이다. 각자 현실이라고 믿는 두 개의 세계가 우연히, 동시에 겹쳐 있을 따름이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집단적인 죽음을 통과”한, “일찍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삶을 시작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은 “어쩌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 꿈꾸는 곳도,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곳도 달랐다.”

사라진 친구들을 되찾고 망가진 세상을 복원하기 위한 진리의 분투가 소설의 맥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네 가지 차원이 공존하는 평행세계를 짓는다. 태어난 진리가 살아가는 세계, 자기 몸의 주인으로서 임신중지를 선택한 진리 엄마가 살아남은 세계, 진리가 사라지는 친구들을 놓쳤던 세계, 그리고 “과거를 바꿔내” 친구들을 다시 만난 세계.

네 차원을 오가는 가운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진리와 엄마가 만난다. 이들은 “임신중지를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라는 두 개의 빈약한 선택지에 머물지 않고 기꺼이 새로운 선택지를 만든다”(이길보라 감독). 다른 세대의 두 여성이 연대해 여자아이만 사라지는 세계를 멈춰 세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고 서로 대화하는데, 이 서술 방식은 문장 뒤에서 보이지 않게 울림을 만드는 배음처럼 정교하게 흘러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소소한 모든 순간을 다 더한 날이 가장 소중했다

“과거부터 바꿔낸다”는 황모과식 접근을 특별히 새겨볼 만하다. 어쩌면 과거는 미래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 진보는 느리지만 퇴보는 순식간이니까. 과거는 지나간 시간에 갇혀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이 순간에도, 언제나 꿈틀댄다”는 사실을 작가는 직시한다. 여성·성소수자 정책 공약 질의에는 답변하지 않음으로써 여성과 소수자를 ‘없는 유권자’ 취급하는 어느 대선후보를 통해서도 예감하지 않는가. 과거는 언제든지 온다.

그러므로 “끔찍한 일들을 ‘완전히’ 과거로 만들자”는, 그래서 “이제 이곳을 우리 세계로” “원래 세계”로, 미래가 출발지로 삼을 과거로 만들어버리자는 진리의 말은 더욱 간절하게 들린다. 20~30대를 살아가는 지금, 여기 1990년대생 여성들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내 삶으로 가장 먼저 시작하고 싶다. 새로운 기억까지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이 소설은 상실과, 상실이 없었다면 주어졌을 관계에 대한, 사무치는 문장으로도 가득하다. 수만명의 아이를 잃은 거대한 재난 앞에서 지나칠 수 없는, 근본적 성찰이기도 하다.

“재밌는 일을 벌이고 싶었고 재밌는 일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에 함께 머물고 싶었다. 좋은 것을 느낄 때마다 나란히 있고 싶었다.” “해라와 함께했던 순간은 아주 소소했다. 거창한 순간만 기다리다 매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우린 소소한 순간을 마구마구 만들었다. 그래서 모든 순간을 다 더한 날들이 가장 소중했다.”

이런 문장을 만날 때마다 한숨이 쉬어질 것이다. 호흡이 내쉬어질 때 ‘나는 살아 있구나, 누군가는 우연히 죽었구나, 그렇다면 나는 우연히 살아 있구나’ 하는 생의 감각이 들숨으로 몸 안에 찰 것이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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