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커버스토리
팽창과 관용의 명·청 중국제국 경계 넘나들며
정체성과 지식으로 독자적 민족국가 유지한 조선
한반도 평화와 통일 이루려면 역사에서 지혜 얻어야
팽창과 관용의 명·청 중국제국 경계 넘나들며
정체성과 지식으로 독자적 민족국가 유지한 조선
한반도 평화와 통일 이루려면 역사에서 지혜 얻어야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북한군 남일(오른쪽 아래)과 연합군 윌리엄 해리슨(왼쪽 위)이 휴전 협정서에 서명하는 모습. 14세기 이래로 명·청 제국과의 관계에서 조선은 독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탈로 그 질서는 허물어진다.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한반도는 분단되고 중국이 개입한 가운데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너머북스 제공
한중 관계 600년사 하버드대 라이샤워 강연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옥창준 옮김 l 너머북스 l 2만원 “2002년 남한의 66퍼센트가 중국을 호의적으로 보았다. (…) 미국을 바라보는 호의적 의견은 52퍼센트였고, 일본은 30퍼센트를 밑돌았다.”(미국 퓨 리서치 센터) 당시 한국 정부가 햇볕정책을 구사하는 가운데 북한 핵 문제가 불거졌고 이후 중국은 6자 회담을 통해 동아시아 외교로 복귀했다. “중국이 핵 협상과 남북한 간의 영구적인 화해를 합의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리라 보고 있었”던 것이 다수 여론이었다. <대장금> 등 한류 드라마도 중국 인민들을 열광적 팬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른바 ‘혐중’ 여론이 물결치는 오늘날, 격세지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한반도와 접경한 중국과의 유구한 관계를 둘러보면, 경천동지할 일도 아니다. 냉전과 제국, 동아시아에 천착해온 노르웨이 출신 역사학자 오드 아르네 베스타 미국 예일대 교수가 지은 <제국과 의로운 민족>은 한-중 관계사 600년을 짧고 굵게 정리하며 한반도의 오늘을 살피고 미래를 내다볼 통찰을 제시한다. ‘제국’은 중국이다. 베스타의 전작 <잠 못 이루는 제국>(까치, 2014)을 보면 중국은 2000년 동안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경계를 지닌 제국이었다. 최소한 근대 이전의 제국은 팽창하며 관용했다. 핏줄이 아닌 문명으로 경계를 구획지어온 제국은, 중국 문화 안팎을 가리지 않고 민족과 인종, 신분을 불문하고 울타리 안으로 포섭했다. <제국과 의로운 민족>에서 저자는 14세기 이래로 명·청에 주목한다. 명 제국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반해 “중국의 전통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를 규율하고자 했다.” 청 역시 “명 제국 대신 제국이 되기를 원했다.” 만주족 황실을 중심으로 중국 제국의 전통을 상속했다. 청이 중화제국이었음은 “1644년 명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을 점령한 이후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의로운 민족’은 한반도에 터 잡고 살아온 한국(조선)인을 가리킨다. ‘의롭다’는 표현은 ‘의’를 추구했다는 뜻에 가깝다. 이성계와 여말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교화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조선을 개국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 조직에 나선다. “조선은 명의 기획보다 더 나아갔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조선은 이념이 중심이 되는 국가였고, 때때로 사회적 규율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할 때 이는 교조주의로 흐르기도 했다.” 특히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중국 및 일본과 구분되는 민족적 정체성이 강력히 형성되는데, 저자는 고 김자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유작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너머북스, 2019)을 인용해, 16세기 말 조선에 19~20세기 유럽인들의 ‘네이션’과 유사한 민족(국가)이 들어섰다고 짚는다. 제국의 속성은 대체로 주변 여러 나라와 지역을 복속하거나 편입하는 데 있으나, 조선은 줄곧 독자 국가로 존재했다. 조선을 침범한 청 제국조차도 “조선과 대립하는 대신, 조선이 제국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조공품의 경감, 제국의 포상, 그리고 무역 기회의 확대 등이었다.” 조선이 제국에 편입되지 않은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저자는 제시한다. 그 하나가 성리학과 민족국가라는 정체성, 즉 ‘의로운 민족’에서 작용한 것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지식이다. 조선의 엘리트들은 중국이 스스로 아는 것보다 제국을 더 많이 잘 알고 있었다. 해마다 여러 차례 사신들이 북경을 오갔는데, 각종 정보가 조선 조정에 보고됐고 각종 무역을 통해 이익을 챙겼다. 무엇보다 중국 내부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제국의 제안이나 요구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중 관계는 19세기 후반부에 들어 거대한 도전과 변화에 직면한다. 조선은 민족 개념이 현대적 형태를 갖추자마자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이 과정에서 중국과의 오랜 관계는 해체되고 한반도는 분단되기에 이른다. 중국 제국 역시 민족주의 국가로 변화했다. 저자가 두껍지 않은 이 책에서 600년의 시간을 삽시간에 훑어내린 것은, 결국 오늘의 한반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이 책 표지를 넘겨 서문을 펼치기 전 ‘평화와 통일을 이룬 미래의 한반도를 위해’라는 헌정사와 만나게 되는데, 한반도의 오늘을 제대로 읽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중국과 한국의 관계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저자는 전작 <냉전의 지구사>(에코리브르, 2020)에서 제국 개념을 들어 냉전을 설명한다. 식민 지배를 당한 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지역 연구와 냉전의 현대사를 결합하는 데로 나아갔고, 마지막 냉전의 땅 한반도와 한반도를 설명할 중국 제국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한반도 독자성의 원인을 복합 주권과 복합 정체성으로 정리한다. 명·청과 조선 사이의 복합적 주권 관계와 조선의 독특한 민족(국가) 개념에 기반한 정체성이 긍정적이고 안정적인 한-중 관계를 유지하게 한 비결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식민 지배를 겪고 분단된 한반도와 중국 모두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자리잡으며 갖가지 갈등과 위험을 야기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오랜 기간 (…) 강력하게 구축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가 지닌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역사가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면 지금 한반도에서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우선 군비 통제, 남북 간 긴장 완화, 마지막으로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북한을 포기하겠다는 중국의 정책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최악의 선택지는 바로 전쟁이다.” 북한 붕괴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견해에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혐중’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건강한 정체성과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당위를, 책 내용을 곱씹을수록 일깨우게 된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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