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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신화와 허세 내려놓고 우리말로 철학하기

등록 2022-02-18 05:00수정 2022-02-18 10:21

[한겨레BOOK]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
철학의 개념과 번역어를 살피다
신우승·김은정·이승택 지음 l 메멘토 l 1만3000원

번역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철학에 대한 일반 대중의 접근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이를 배우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개념을 갈고닦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어떤 논변이 ‘타당성(validity)과 건전성(soundness)을 지닌다’고 옮기곤 하는데, 과연 이 우리말들은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가?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는 철학에서 흔히 쓰이는 우리말 번역이 과연 뜻을 제대로 옮기고 있는지 살피고, 그보다 적절한 우리말을 제시하는 책이다. 14개가량의 번역어를 문제삼는 등 분량은 많지 않으나, 관성에 머물지 않고 철학적 개념들을 현대 한국어로 좀 더 적확하게 담기 위한 시도를 보여준다. 학문공동체 ‘전기가오리’의 운영자 신우승이 썼고, 신우승의 대체 번역어 제안에 공동 지은이인 김은정·이승택의 반론을 거쳐 최종 번역어 제안에 이르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validity의 경우, 지은이는 전제에서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등 논변의 형식적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옳다’는 어감이 담겨 있는 ‘타당성’보다는 ‘유효성’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제안한다. soundness는 “논변이 형식의 측면에서 유효할 뿐 아니라 전제도 참이라서” 논변 전체가 견고하고 견실하다는 뜻이라며, ‘견실성’이라는 대체 번역어를 제안한다. ‘형이상학’이라 옮겨지는 metaphysics를 ‘메타자연학’으로 옮기자는 제안도 신선하다. ‘형이상학’은 ‘형태 너머의 것을 다루는 학문’을 의미할 텐데, 이는 “이 세계 너머의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는 지적이다. ‘인식론’으로 옮겨지는 epistemology는 ‘지식 이론’, ‘공리주의’로 옮겨지는 ‘utilitarianism’은 ‘유용주의’ 등 이런 식으로 검토를 거친 대체 번역어 제안들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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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를 쓴 학문공동체 ‘전기가오리’ 운영자 신우승.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한 단어를 여러 철학자들이 다르게 쓸 때”에 대한 제안도 있다. 지은이는 개별 철학자의 서로 다른 논지를 반영하는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어내기보다는, 기존 번역어를 고정해서 쓰되 ‘이 철학자는 이런 의미로, 저 철학자는 저런 의미로 쓴다’는 식으로 “해당 개념의 내포(intension)를 추가하는 것”을 제안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선험적”으로 옮길 것이냐 “초월(론)적”으로 옮길 것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던 칸트 철학의 핵심 용어 transcendental을 꼽는다. 이 단어 자체는 ‘초월적’이라는 뜻으로 쓰이나, 칸트는 여기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넘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 안으로 되돌아온다는 독자적인 뜻을 담았다. 그런데 칸트에만 한정해 이를 ‘선험적’이라 옮기면 매 철학자마다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이 때문에 지은이는 ‘초월론적’으로 옮기자고 제안한다. category의 경우 여러 철학자들이 다른 의미로 쓰지만 우리말로는 똑같이 ‘범주’로 옮긴다는 점도 사례로 들었다. 또 이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존재, 현존, 실존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existence의 번역어도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지은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읽고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며, “이 책에 담긴 제안을 통해 철학을 둘러싼 신화와 허세가 줄고, 정말로 이해하여 알게 되는 것이 조금이나마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썼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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