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총에 맞아 숨진 남성(27)의 장례식에서 부인과 딸이 영정 사진을 안은 채 울고 있다. 미얀마 시민불복종운동(CDM) 제공
나의 투쟁 보고서
켓티 외 지음, 우 탄툿우 옮김 l 들꽃 l 1만6000원
2022년 2월, 미얀마 민주화 운동 1년을 맞았다. ‘미얀마의 봄’은 어디까지 온 걸까. 사망자 1557명(2월17일 기준,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 체포된 이는 1만2000명이 넘는다. 군부의 폭력을 피해 산으로 숨거나 삶의 터전을 떠난 실향민은 80만명이다.
건재한 군부는 장기집권의 길을 닦고, 주요 도시의 거리는 시민들의 ‘침묵 파업’ 시위로 텅 비었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안갯속이다.
그 침묵 사이로, 300여개 목소리가 한국에 도착했다. 미얀마 시인들의 것이다. “절벽 아래 떨어진 나라를/ 꽉 잡아 구제”할 “늦은 봄”(렌뗏예잉)을 외치고 또 외치는 목소리. 미얀마 혁명시집 <나의 투쟁 보고서>다.
표제작은 유고 시다. 시인 켓티를 기억하시는가. “그들은 머리에 총을 쏘지만,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걸 모른다”는 저항시를 썼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지난해 5월 장기가 모두 적출된 채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나의 투쟁 보고서’부터 읽어보자. 시 일부가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 버마어 원전 번역된 전문은 처음 공개된다.
영웅도 되기 싫다
애국자도 되기 싫다
우유부단한 겁쟁이 또한 되고 싶지 않다
입만 살아 있는 허풍쟁이도 되기 싫다
갈팡질팡 미루기만 하는 그런 자도 되기 싫다
스스로 부끄럼을 느끼는 이도 되고 싶지 않다
혀가 잘린 채 말을 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구속된 인권을 지닌 채 살아도 보았다
우리는 거세된 나날을 지나와야 했다
우리가 살아온 지옥은 우리가 결론짓고 싶다
물위에 뜬 기름 같은 정치인은 되기 싫다
상상 속에서 사는 시인도 되기 싫다
불의를 지지하는 인간은 더욱 되고 싶지 않다
삶이 단 일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마지막 1분을 깨끗한 영혼으로 보내고 싶다
미얀마 북부 카친주 미치나에서 지난해 3월8일 한 수녀가 경찰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군부 쿠데타 규탄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을 만류하고 있다. 미치나 뉴스 저널=연합뉴스
군부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시인은 4명이다. 산 채로 불탄 세인 윈. 군부 지지자가 습격해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찌린에이는 집회 도중 총격을 당해 숨졌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30명 넘는 작가가 체포되었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도 있다.(미얀마 시인 티낫코 ‘발문’)
목숨 걸고 쓰인 시들이 미얀마에선 널리 읽히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출판 검열, 인터넷 접속 차단 때문이다. 한국까지 오는 일도 물론 쉽지 않았다. 시집을 기획한 ‘창작21’ 문창길 시인은 군부의 인터넷 활동 감시로 출간 과정도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한겨레>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미얀마작가회의를 비롯해 다양한 단체의 문인들이 쓴 시 300여편을 미얀마의 한 중견 작가가 2021년 여름부터 건네줬다”며 “현지에서는 인쇄·출판 감시와 검열로 책을 내기 어렵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애초 미얀마 혁명시는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직후부터 활발하게 쓰였다. ‘봄혁명시’라는 슬로건으로 수백편의 시가 발표된 일이 대표적이다. “2021년 2월부터 시인들은 벽시, 전단시, 현수막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창작 투쟁을 전개해왔다. 집회에서 시를 낭독하거나 나누어주기도 하며 민주화 운동을 고무했다.”(문창길 시인)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거리는 텅 비었다. ‘봄이 개한테 물린 날’들, 시인은 “노래를 하지 않았는데 목이 아프다”(네웬칸)
미얀마 군부 쿠데타 1년을 맞은 2022년 2월1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이 ‘침묵 파업’ 시위를 벌였다. 만달레이의 도심 거리가 텅 비어 있다. AP 연합뉴스
시집 속에서, 들릴 리 없는 침묵시위의 진짜 소리들이 비로소 조금씩 들리는 듯하다. 무섭도록 기품 있는 경고부터. “무장하고도/ 겁먹은 집단은 너희다 (…) 너희들에게/ 다음 장은 없어야 한다/ 이 연극으로 모든 것이 끝이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우리는 목숨을 빼앗지 않고/ 정신만 죽여버리겠다”(‘시대가 우리의 어깨 위에’ 루엔뚜)
여전히 희생을 감당할 만큼의 간절함. “불에 타고 있으니/ 피로 불을 꺼야 한다 (…) 다른 곳에 쓰면 지워질까봐/ 피부 위에 새겼다/ “봄혁명””(‘혁명하는 인생’ 싸웅웨) “우리는 비가 오고 있든 말든/ 2월의 피로/ 우리들의 목숨 같은/ 천둥번개로 내려 칠 것이다”(‘우리는’ 응아자)
이 안갯속을 꿰뚫어 보는 통찰. “삶의 죽음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가짜”(‘밤이 길지 않기를’ 녜잉캇웨) “우리는 죽었다/ 우리는 죽어야 했다/ 그러나 역사는/ 살아 있다”(‘혁명’ 링딴네잉)
무엇보다, 긴 싸움보다 더 끈질긴 호흡. “담이여, 너는 돌담/ 우리는 힘/ 무너질 때까지 싸운다”(‘담’ 킷셋링) “작은 나뭇가지들을 모으면 큰 묶음의 나뭇가지가 되고/ 작은 손가락들을 모으면 주먹이 된다/ 국민들이 다 함께 뭉치면/ 무너지지 않을 독재가 있겠는가?”(‘쉐바의 주먹들’ 렌땃녜잉) “우리에게는 무기가 없다/ 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작은 바늘도 없다/ 갖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는 오직 진실만 있다/ 세 손가락을 세운다// (…) 혁명은 성공한다/ 혁명은 성공한다/ 혁명은 성공한다”(‘오늘의 길’ 아웅뗏짜인)
미얀마 쿠데타 한 달 뒤였던 지난해 3월1일 양곤에서 시민들이 한 손에 붉은 장미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저항을 상징하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모습. 양곤/EPA 연합뉴스
미얀마 쿠데타 뒤 첫 주말이던 지난해 2월7일 최대 도시 양곤에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군부 쿠데타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양곤/로이터 연합뉴스
2월의 봄 멀어도, 3월은 혁명의 시를 계속 씁니다
특히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온 ‘제트(Z) 세대’는 빛나는 시어가 되어 많은 작가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고 있다. “자기 믿음만을 갖고/ 나서서 투쟁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어떠한 깃발도 씌우려 하지 마라”(‘Z세대’ 라옷뉴타웅) “네가 받은 과일은 썩었다/ 그런데 좋은 씨 한 개가 남아 있구나// 그 하나의 씨 속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남아 있구나// 넓은 그늘 하나가 남아 있구나 (…) 그 씨 한 개 속에/ 여러 개의 씨들이 숨어 있나니”(‘손자의 세대-Z세대’ 꼬딴툰)
시집을 번역한 우 탄툿우 동국대 교수(국제경영학)는 미얀마 출신이다. 그는 <한겨레>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혁명시를 한국어로 옮기는 동안 “보람”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했다.
“엠(M) 세대인 저만 해도 군사독재 체제에서 태어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어보지 못한 채 성장했습니다. 이번 혁명 최전선에서, 그리고 시민방위군에도 합류해서 군부에 저항하고 있는 제트 세대 청년들을 보면 우리 세대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로 희생당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부끄럽습니다. 한국 시민들께 혁명시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미얀마 시민들은 여전히 매 순간 싸우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미얀마 혁명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국가 중 하나입니다. 세계인과 함께 미얀마의 싸움에 동참해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지난해 3월3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경찰의 총격이 시작되자 엎드리고 있다. 왼쪽 여성이 이날 숨진 ‘에인절’ 혹은 ‘치알 신’이다. 이 여성이 입은 티셔츠에는 ‘모두 잘될 거야’(Everything will be OK)라는 영문이 적혀 있다. 이 문구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만달레이/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3월30일 미얀마 양곤의 거리에서 군부 반대 시위에 참여한 청년이 서 있다. 양곤/AFP 연합뉴스
미얀마 혁명시는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에 먼저 왔다. 한국이 읽고, 세계에 전해달라는 요청인 셈이다. 시인들의 바람은 하나였다고 한다. “미얀마를 기억해달라.” 혁명시집 두번째 권도 나올 예정이다. <나의 투쟁 보고서>에는 한국에 전해진 300여편 중 108편이 실렸는데, 나머지 시도 곧 번역에 들어간다. 시집 판매 수익금 일부는 혁명시를 쓴 시인과 목숨을 잃은 시인을 위한 기금으로 전달된다.
우리가 시를 읽는 동안 그들의 문학 투쟁도 계속될 것이다. ‘2월의 봄’(켄흐닌포웨) “꽃들을 잡아 감금했으나/ 봄은 자유롭게 태어났습니다”. “3월은/ 혁명의 시를 계속 씁니다”(‘봄의 교향곡’ 멘뇽르하인).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