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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전시되거나 파괴되는 여자의 몸과 삶

등록 2022-02-25 04:59수정 2022-02-25 09:53

[한겨레BOOK]
한정현 장편 ‘…먼로라고 하자’
문화사적 접근에 추리적 구성
여성 빨치산과 인터섹스 등
소수자와 피억압자 삶 재조명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4000원

한정현은 문화사적 접근법으로 소수자의 잊힌 삶을 복원하는 데 능한 작가다.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와 단편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두 책으로 그는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두 번째 장편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에서도 그런 특징은 이어진다.

소설은 ‘셜록’이라는 인물이 주인공 설영에게 보내는 수수께끼 같은 초대장으로 문을 연다. ‘셜록’은 오래전 사라진 설영 친구 지연의 별명. 둘은 한동안 같이 살기도 했는데, 설영이 사고로 단기 기억상실을 겪을 무렵 셜록이 실종되었다. 유명한 탐정을 가리키는 이 별명에서 보듯 소설은 추리적 구성을 지닌다. 셜록의 초대장에 적힌 번역 소설들 제목과 네 개의 연도 등은 설영으로 하여금 그의 잊힌 기억과 셜록의 실종에 얽힌 비밀을 추적하라는 호소이자 힌트인 셈이다.

설영은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이자 국문학 연구자로 지금은 일본의 한 대학 부설 어학원에서 일하고 있다. 의대에서 의학사를 전공한 셜록은 설영과 같이 수강한 문화사 수업에서 <남부군>과 <빨치산의 딸>을 읽은 뒤 전쟁기 빨치산들의 공중보건 사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한편 설영을 자신의 보조연구원으로 등록한 바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들의 연구가 경로를 이탈하면서 도달한 지점에 ‘빨치산이 된 트랜스젠더’ 김춘희가 있다.

“우리 다 마릴린 먼로 같지 않나요? 아름답다고 추앙하다가 거부하면 부숴버릴 듯 달려드는 사람들. 여자로서의 삶은 평생 어딘가에 전시되는 것만 같았어요. 내 몸은 마치 공공 기물 같은 느낌이었죠.”

소설 제목과 연결되는 이 발언을 한 것이 김춘희이고, 그 발언을 들은 이는 성형외과 의사 지윤이다. 지윤은 미용 성형은 마다하고 사고로 얼굴 복원이 필요한 이들이나 트랜스젠더 및 인터섹스 환자들만 받겠는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다. 1938년생인 김춘희는 지윤 병원의 최고령 환자로서 성전환 수술을 받으면서 위의 발언을 한 터였다.

김춘희의 말에 소설의 제목과 주제의식이 담겨 있는 셈이다. 이 사회의 성 차별과 폭력은 빨치산조차 예외가 아닐 정도로 유구하고 보편적이라는 것. 여성과 여성의 몸이란 전시되어 추앙받거나 공공 기물처럼 함부로 쓰이고 버려지지 않으면 폭력과 파괴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 산 위에서조차 약한 사람들은 그렇게 늘 아무렇게나 건드려도 된다는 식의 취급을 당했어요. (…) 산에서 내려올 땐 같이 있던 놈들이 달려들었고 잡히니까 남조선 놈들이 고문하면서 달려들었어요.”

김춘희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고 그를 사랑했던 이의선 할머니는 일본으로 자신을 인터뷰 하러 온 셜록과 설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경험과 김춘희의 경험을 아울러 담은 이 발언이 여성과 성 소수자가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를 알려준다면, 셜록과 설영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이야기는 그것이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김춘희의 외손녀 레나를 만난 자리에서 설영이 하는 말에 그런 인식이 담겼다. “우리가 겪는 일들은 지금도 너무나 비슷해요.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아요.”

설영의 말은 우선 셜록의 실종으로 이어진 사건들을 겨냥한다. 불법 촬영과 음해성 소문, 따돌림에 시달리던 셜록이 궤도를 이탈한 별처럼 홀연 자취를 감춘 일이 설영이 겪은 기억상실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셜록이 김춘희의 구술 증언을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것이 단지 연구자로서의 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더 깊은 동기와 필연성을 지닌 것이었다는 점도 독자는 소설 말미에 가서 알게 된다.

설영과 함께 셜록의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성형외과 의사 연정은 소설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한다. 처음에 설영과 연정의 이야기는 서로 무관한 듯 따로 진행되다가 소설이 절반 정도 진행된 뒤에야 두 사람이 비로소 만나게 된다. 둘을 이어준 것은 역시 사라진 셜록이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왓슨들’이 되어 추리와 추적을 함께 한다.

두 번째 장편소설 &lt;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gt;를 낸 작가 한정현. 소설에서 빨치산 내 성폭행 문제를 다룬 것과 관련해 “커다란 틀에서 이야기되면서 누락된, 혹은 누락시켰던 여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두 번째 장편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를 낸 작가 한정현. 소설에서 빨치산 내 성폭행 문제를 다룬 것과 관련해 “커다란 틀에서 이야기되면서 누락된, 혹은 누락시켰던 여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사실 코넌 도일의 분신은 셜록이 아니라 왓슨이래요. 기록하는 자.”

이 말을 한 도영은 연정과 재혼했던 전 남편의 아이로, 연정은 네 살부터 10년 동안 도영을 사랑으로 키웠다. 추리소설에 푹 빠졌던 도영은 동성 친구와 사귀었는데, 그들이 “레즈 페미인 척하고 다”니는 게 못마땅했던 남자아이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쇼크로 죽었다. 연정이 셜록의 행방과 안위에 비상한 관심을 지니고 제 일처럼 나서게 된 배경에는 “이제 누구도 도영이처럼 가게 두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다.

“성범죄 사건에서 결국 사라지는 게 여자들이라는 것. 숨어버리고 마는 건 약한 사람들, 여자들과 성소수자들과 노인과 아이와… 결국 우리.”

연정의 선배이기도 한 지윤의 시점으로 서술된 이 문장들은 고통을 겪고 사라지거나 살해되는 것이 김춘희와 셜록과 도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부모가 없는 가운데 설영을 친딸처럼 키운 할머니는 일하던 공장의 작업반장에게 장기간 성추행을 당하고 모함까지 뒤집어쓴 끝에 사고로 죽었다. 설영이 취미 삼아 다니던 사격연습장의 주인인 메이는 선수촌에서 성적 괴롭힘을 당하다가 사격 선수 생활을 그만두어야 했다. 설영의 룸메이트였던 신바는 동성인 한국인 유부남과 사귀다가 스토커로 모함을 받고는 버림받는다….

이런 사례들이 지나치게 어둡다면, 이의선 할머니의 양아들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그에 대한 중화제 삼아 새겨 들어 보면 어떨까 싶다.

“이제는 나를 키워준 내 어머니가 그렇게 사랑했다는 사람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사랑으로 키운 건 전부 그분 덕분이 아닌가 싶어서 그래요.”

어둠과 폭력을 이기는 것은 역시 사랑에서 나오는 빛임을, 어둠이 짙을수록 빛 또한 더욱 찬란하리라는 것을 이 말은 새삼 깨닫게 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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