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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읽고 쓰는 구석방에서 ‘나다운 사람’ 되는 시간

등록 2022-03-04 05:00수정 2022-03-04 09:21

‘울리포’ 프랑스어 번역의 어려움
작가 밉지만 도전 끝 보람 커
25년간 우직하게 매년 1만매 옮겨
가장 마음 편한 시간 포기 못해
[한겨레Book] 번역가를 찾아서 - 이세진 프랑스어 번역가

이세진 번역가를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있는 독립서점이자 북카페 ‘좋은 날의 책방’에서 만났다. 자택 인근에 있는 이곳은 책을 사랑하는 그의 쉼터이자 또 다른 작업 공간이다.
이세진 번역가를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있는 독립서점이자 북카페 ‘좋은 날의 책방’에서 만났다. 자택 인근에 있는 이곳은 책을 사랑하는 그의 쉼터이자 또 다른 작업 공간이다.

두 달간 대마왕과 사투를 벌인 이세진 번역가의 표정이 뜻밖에 차분하다. 그는 지난 연말 출판사의 ‘초긴급’ 요청을 받아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L’Anomalie, 변칙) 번역에 매달렸고, 인터뷰 전날 원서의 맨 마지막 단어 ‘f-i-n-e’(세로로 쓰여 있다)를 ‘ㄲ ㅡ ㅌ’으로 옮겨 마무리한 뒤 출판사에 넘긴 참이다.

“프랑스 문학에는 말과 글을 유희하듯 실험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이 있는데 줄임말로 ‘울리포’(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 잠재적 문학의 실험장)라고 해요. 텔리에는 이 분야의 수장 격이어서 <아노말리>는 전 세계 번역가들에게 악몽과도 같았죠. 작가와 6개국 번역가들의 워크숍이 열리고, 그 내용이 공개돼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활용될 정도였어요.”

전개는 추리소설 비슷한데 초반은 운문이라 리듬감을 살려 번역하고, 산문으로 바뀌는 중반부터는 문체를 달리해야 했다. 심지어 마지막 단락은 “단어들이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모래처럼 보이도록 디자인”되어 있어, 이를 한글 단어로 디자인하는 ‘묘기’도 부렸다. 그 와중에 “프랑스에서 (모처럼) 100만 부나 팔릴 정도로 대중성 있는 작품인 만큼 한국 독자들에게도 편안하고 흥미롭게 읽히는 번역을 추구했다”니, 프랑스어 번역가에게 고난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좀 이상한 얘기지만, 저는 이런 작품을 좋아해요.(웃음) 마침표가 없는 작품이나 알파벳 e가 한 번도 안 나오는 작품도 있었는데, 이런 번역은 문장이 아니라 작가의 ‘규칙’ 또는 ‘제약’을 번역해야 하거든요. 번역가에겐 도전이자 보람이죠. 물론 작업할 땐 작가가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요.(웃음)”

출판사가 이처럼 까다로운 작업을 급행으로 요청한 것은 이세진 번역가가 속도와 작업량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동료 번역가들조차 그가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이세진 번역가는 지난 25년간 매달 원고지 800~1000매, 매년 1만 매가량을 꾸준히 작업해왔다. 문학, 철학, 사회과학, 심리학, 수학,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어른 책 150여 종과 <돌아온 꼬마 니콜라>, <엠마> 시리즈를 비롯한 수많은 어린이책, <설국열차>나 <발레리안> 같은 만화책까지, 방대한 출간 목록의 소유자다.

“대학원(서강대 불어불문학과)에 다닐 때 학과 사무실에 걸려온 번역의뢰 전화 한 통이 계기가 됐어요. 그때부터 쭉 전업 번역가로 일했으니 이제는 책을 훑어보면 대략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지 계산이 나오죠. 마감일을 기준으로 하루치 작업량을 정하고, 번역 일과 주부이자 엄마로서의 일을 모두 고려해서 세부계획을 짜요. 원고 10매를 번역한 다음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고, 다시 20매 번역한 후엔 밥을 하는 식이죠.(웃음) 평일에는 번역에 집중하고 주말에는 이전에 번역한 책의 교정지(편집과 디자인을 마친 원고)를 보고요.”

촘촘히 세워둔 계획은 반드시 지켰다. 미뤘다간 “약속한 일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토록 우직하고 한결같았으나, 작업환경은 끊임없이 변했다. 엄마가 번역한 프랑스어 그림책의 첫 독자였던 어린 딸은 어느새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살림살이 규모가 더 커지기도 했다. 여러 부침 속에도 끝내 자신의 일을 지켜내며 휴가 한 번 가지 않는 그를 두고 지인들은 “독하다”고 놀리지만, 이세진 번역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번역할 때 저는 가장 저다운 사람이 돼요. 번역에 집중하는 시간이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시간이고 가장 마음 편한 시간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끈기가 없고 체력도 약한 편인 제가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번역이 재미있고, 행복하기 때문이에요.”

7살 무렵 큰 화상을 입어 1년 넘게 눕거나 앉아 있어야만 했던 이세진 번역가는 ‘책만 있으면 일년 내내 방안에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집 근처 독립서점 ‘좋은 날의 책방’ 단골이 된 것도 서점 한 켠에 이런 심경을 잘 표현한 글귀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토마스 아 켐피스) 그러니 읽고 번역할 책이 있는 한, 이세진 번역가는 언제까지나 구석방의 행복한 번역가로 살아갈 것이다.

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음악의 기쁨 1~4

롤랑 마뉘엘 지음, 북노마드(2014)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롤랑 마뉘엘이 피아니스트 나디아 타그린과 3년간 라디오 방송에서 나눈 이야기를 엮은 시리즈. “두 사람의 티키타카를 따라가면서 언급된 음악들을 검색해 듣노라면 어느새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게 되는” 신비한 입문서다.

살아 있는 정리

세드릭 빌라니 지음, 클로드 공다르 그림, 해나무(2014)

괴짜 수학자 세드릭 빌라니의 자전적 에세이로, 그가 2010년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하기까지 연구 과정이 담겨 있다. “임선희 서울대 수학과 교수와 함께 번역하면서 수학자들의 언어 세계를 엿보는 귀한 경험을 했다”고.

가시도치의 회고록

알랭 마방쿠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7)

대문자와 마침표가 단 한 개도 없는 이 소설은 알랭 마방쿠의 작품으로 2006년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인간으로 분해 살아가는 가시도치 ‘느굼바’가 마침표 없이 풀어내는 42년 인생 이야기를, 이세진 번역가 또한 마침표 없이 번역했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지음, 열린책들(2017)

고대철학의 권위자 피에르 아도의 대표작으로, 초판을 번역했던 이세진 번역가가 독자들의 꾸준한 요청으로 2017년 기존 번역서를 다듬어 재출간했다. “철학은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실제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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