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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코로나와 닮은 100년 전 페스트의 풍경

등록 2022-03-11 05:00수정 2022-03-11 09:14

오르한 파무크 소설 ‘페스트의 밤’
20세기 초 지중해 가상 섬 배경

방역 훼방 놓는 극성 종교인 등
한국의 코로나 사태 떠오르게 해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l 민음사 l 1만9000원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페스트의 밤>은 코로나19를 떠오르게 하는 전염병 페스트를 등장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는 2016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니,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작가 특유의 신비한 예지력의 산물이라 하겠다.

소설은 오스만 제국이 쇠락을 향해 가던 1901년, 지중해 동쪽 가상의 섬 민게르를 덮친 페스트를 소재로 삼는다. 오스만 제국의 총독이 통치하는 이 섬에 페스트가 발생하자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방역 전문가 본코프스키를 민게르로 파견한다. 그러나 총독 사미 파샤는 “우리 도시에 결단코 전염병은 없소!”라며 페스트의 존재를 부인하고, 현장을 시찰하던 본코프스키는 누군가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무슬림 인구와 기독교 인구가 절반씩을 차지하는 이 섬에서 양 종교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상대 종교를 페스트의 온상으로 지목하거나 방역 전문가가 오히려 전염병균을 섬에 들여왔다고 의심하기까지 한다. 본코프스키의 죽음 이후 제국의 술탄은 자신의 조카 파키제의 남편이기도 한 의사 누리를 후임 방역 책임자로 보낸다.

총독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방역을 위해 학교 휴교와 상점 영업 금지, 집합 금지, 예배 중지 같은 비상조치들이 시행된다. 섬과 바깥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여객선 운항이 중지되고, 섬을 몰래 빠져나가려는 행렬이 줄을 잇자 오스만 제국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열강들과 함께 전함을 보내 섬을 봉쇄한다. 민게르의 신민들을 페스트로부터 보호하기보다는 섬에 만연한 페스트가 섬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제 우리는 페스트와 홀로 남게 되었소!”

총독의 이런 말은 민게르 섬이 카뮈 소설 <페스트>의 무대인 오랑 시와 비슷하게 고립되었음을 알게 한다. <페스트>와의 유사성 또는 <페스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로 읽히는 대목은 더 있다. 민게르 섬의 가장 큰 무슬림 종파 지도자인 셰이크 함둘라흐는 전염병에 대한 과학적 대응 대신 절대자의 뜻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페스트>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인 파늘루 신부를 떠오르게 한다.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하는 것밖에 다른 위안이 없습니다.”

결국 그 자신 페스트균의 방문을 받아 죽고 만다는 점에서도 셰이크는 파늘루 신부를 빼닮았다. 셰이크의 맹신은 단지 그 한 사람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당국의 방역 노력을 방해하고 사태 해결을 지연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당국의 금지를 피해 몰래 예배를 보는 행위를 단속하려는 병사들에게 신자들이 폭력으로 맞서기도 하고, 율법에 따라 장례 전에 주검을 씻기는 과정에서 페스트가 급속도로 퍼지기도 한다. 신앙을 명분으로 방역 노력을 방해하는 행태는 코로나 시대 한국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라 하겠다.
1901년 오스만 제국 치하인 지중해 동쪽 가상의 섬 민게르에 페스트가 퍼지는 상황을 설정한 소설 &lt;페스트의 밤&gt;을 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 터키에서 출간된 지 1년 만에 터키 문학 전문가 이난아 박사의 번역으로 한국어판이 나왔는데, 영미판은 올 하반기에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민음사 제공
1901년 오스만 제국 치하인 지중해 동쪽 가상의 섬 민게르에 페스트가 퍼지는 상황을 설정한 소설 <페스트의 밤>을 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 터키에서 출간된 지 1년 만에 터키 문학 전문가 이난아 박사의 번역으로 한국어판이 나왔는데, 영미판은 올 하반기에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민음사 제공

페스트가 만연한 민게르 섬에 무지와 몽매의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오직 자기 목숨을 구할 생각만 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사망자의 집을 방문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도왔다.” 이 역시 카뮈 소설 <페스트>에서 의사 리외와 기자 랑베르 등이 헌신적인 희생으로 방역 전선에 뛰어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페스트의 밤>에는 이와 함께 신혼부부 두 쌍과 총독 사미 파샤와 그의 연인 등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의 행위에서 맛보는 행복과 위안을 그린 대목들이 자주 나온다. 언제 죽음이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사랑이 지니는 힘을 새삼 알게 한다.

“그 시간에 잠시의 행복과 위안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이성적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희미한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안는 것임을 총독 파샤나 콜아아스나 누리나 이제는 다 알고 있었다.”

<페스트의 밤>이 <페스트>와 가장 다른 점은 감염과 방역이 충돌하고 제국과 신민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이 작은 섬이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는 데에 있다.

“이스탄불로부터 전보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리기 시작하면 방역은 끝날 것이고, 질병은 잠잠해질 것이며, 우리 모두 안전해질 겁니다.”

경호를 위해 파키제와 누리를 수행한, 민게르 섬 출신 장교 콜아아스 캬밀이 모종의 우연과 폭력을 거친 끝에 민게르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하는 말이다. 초대 대통령이 된 콜아아스 이래 짧은 시간에 몇 차례 정권이 바뀌고 방역 정책 역시 해제와 강화를 반복하는 등 혼란을 거듭하지만, 결국 강력한 방역 정책 아래 이 섬나라는 마침내 페스트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이 소설의 작가이자 역사학자이며 여러분이 읽는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 중 한 명의 직계 후손임을 이제 밝혀야겠다.”

2017년 시점으로 서술된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문득 이렇게 밝힌다. 이 화자가 누구인지, 그가 말하는 주요 인물은 누구인지는 소설을 끝까지 읽어 보면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의 에필로그에 오르한 파무크 자신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1980년대에 박물관에서 오 분 거리인 니샨타쉬에 있는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 강박적으로 그곳(군사박물관)을 방문하곤 했다고 내게 말했다.”

이 문장으로부터 두어 페이지 뒤에도 “박물관을 좋아하는 소설가 파묵과 내가 공유하는 관심사”라는 표현이 다시 나오는데, 이는 파무크의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설정이자 독자에 대한 일종의 서비스라 할 수도 있겠다.

(오르한 파무크는 책에는 ‘파묵’으로 표기되었으나 국립국어원의 한국어 어문 규범에는 ‘파무크’로 표기하도록 되어 있어 양쪽을 혼용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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