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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언니들의 환대와 우정이 나를 살린다

등록 2022-03-25 05:00수정 2022-03-25 15:37

[한겨레BOOK]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김해자 지음 l 한티재 l 1만5000원

김해자(사진) 시인이 연고도 없는 농촌에 살면서 농사도 배우고 문학과 생태 강의를 해 온 지 어언 15년째다. 그의 새 산문집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는 그가 농촌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진솔하게 풀어 놓는다. 스스로 ‘변방’이라 표현하는 농촌의 일상이란 게 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을지 몰라도, 그 안에는 인간을 살리고 지구 생태계를 구할 지혜가 담겨 있다고 그는 믿는다. 책 제목이 그런 뜻을 담았다.

2020년에 낸 시집 <해피랜드>에 실린 시 ‘이웃들’은 병을 얻어 큰 수술을 받느라 한 달여 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시인을 맞이하는 이웃들의 조건 없는 환대와 보살핌을 보여준다. 아랫집 어머니는 시인을 꼬옥 안아 주며 말한다. “걱정 마라고,/ 우덜이 다 뽑아 김치 담았다고 얼까 봐/ 남은 무는 항아리 속에 넣었다고”. 앞집 어머니와 옆집 어머니도 기웃하더니 “둥근 스뎅 그릇 속 하얗고 푸른 동치미와 살얼음 든 연시와 아랫집 메주가” 순식간에 평상에 놓인다. 시인은 “저 노동과 환대와 우정을 먹고 제 몸이 차차 나아지고 있”다며, 그렇게 시적인 삶 혹은 시적인 태도로 나와 이웃과 세상을 만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시인이 아니겠냐고 묻는다.

“문 두드려서 나가 보면 하얀 보자기에 든 밥솥 들고 서 있고, 문 두드려 나가면 청국장 거의 다 끓었다고 서 있고, 나가 보면 물김치 통 놓고 가는 동네 언니들과의 우정이 저를 여기까지 이끈 것 같아요.”

이효영 제공
이효영 제공

농촌이 우애와 환대의 이상향이라는 뜻은 아니다. 자칭 ‘백수’로서 시인은 “콩 튀듯 팥 튀듯 바쁜 집에 가서 고추도 따 주고 마늘도 심어 주고 깨도 같이 털면서 일을 해 주”고, 한 달이면 열 번쯤은 ‘언니’들과 점심밥도 같이 해 먹는다. 그렇게 밥을 나누면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시로 받아 적는다. “밥맛 읎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언니들과의 저녁식사’), “도리깨질하는 앞에 서서 고개만 까딱거려도/ 수월하다”(‘백수도 참 할 일이 많아’) 같은 지혜의 말들이 그렇게 시인에게 왔다.

시인이 사는 동네 산 정자에는 그의 시 ‘백수도 참 할 일이 많아’가 나무 액자에 담겨 있다. 임영자 씨며 맹대열 씨며 양승분 씨의 이름이 실제 그대로 등장하는 이 시를 보며 당사자들은 킥킥대며 웃는다. 백수인 시인도 따라 웃으며 묻는다. “시인은 저분들인데 제 이름도 써 있는 저 시는 누구의 것일까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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