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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는 것이 곧 인간이 되는 것이다…주디스 휴먼의 삶을 보라

등록 2022-03-25 05:00수정 2022-03-25 11:00

[한겨레BOOK]
미국 장애운동 주역의 자서전
차별에 맞선 주디스 휴먼의 삶
소송·점거 등 운동에서 행정까지
모든 장애인권운동이 걸어온 길
1977년 연방 정부 차원에서 장애인에게 시민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재활법 504조’ 투쟁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주디스 휴먼의 모습. 사계절 제공
1977년 연방 정부 차원에서 장애인에게 시민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재활법 504조’ 투쟁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주디스 휴먼의 모습. 사계절 제공

나는, 휴먼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l 사계절 l 1만7000원

1964년 미국 시민권법은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 국가에 근거한 차별을 포괄적으로 금지했으나, 장애는 미처 담지 못했다. 법적으로 장애인이 어떤 차별도 받지 않을 시민으로 선포되기까지는,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 제정될 1990년까지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60년대 시민권 법제화 과정이 그랬듯 장애 인권 법제화에도 지난한 투쟁이 있었다. 수많은 장애인들이 길을 막거나 바닥에 드러눕고, 계단을 기어오르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릴 때까지 휠체어로 들이받아야 했다.

<나는, 휴먼>은 미국 장애운동의 역사를 대표하는 활동가 주디스 휴먼(75)의 자서전이다. 생후 18개월에 소아마비를 앓고 손과 팔만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휴먼은 1970년 장애인이란 이유로 교사 자격을 내어주지 않은 뉴욕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승소하면서 뉴욕 최초의 첫 장애인 교사가 됐다. 그는 미국장애인법이 제정되는 데에 결정적인 길을 놓은 1970년대 ‘재활법 504조’ 투쟁에서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건물을 24일 동안 점거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등 줄곧 장애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1980년에는 국제적 장애인 단체인 세계장애인기구(WID)를 공동 설립했으며, 1990년대에는 빌 클린턴·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세계은행 등에서 장애 관련 정책을 다루는 행정가로 일했다. 한마디로 장애 인권 문제를 처음 제기하고, 그와 관련된 법을 만들고, 현실 속에서 그것이 실현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 전체로 투쟁한 사람이다.

휠체어를 타는 휴먼은 한평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단과 턱뿐 아니라, ‘화재 위험 요인’이라며 입학을 거부당하거나 홀로 비행기 탑승을 거부당하는 등 끝도 없는 장애물들을 맞닥뜨려야 했다. 시민권 운동과 함께 성장한 휴먼과 그의 세대는 결코 장애를 ‘고쳐서 해결되는 의료적 문제’라거나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 등으로 보지 않았다. “장애는 누군가에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이러한 삶의 진실을 중심으로 인프라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휴먼은 차별과 배제의 벽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장애인의 교사 자격을 놓고 뉴욕시 교육위원회에 승소한 일은 대중적으로까지 알려진 그의 첫 투쟁이다. 훗날 임신 중지 합법화 논의에 선구적 역할을 한 변호사 로이 루카스, 연방 법원에 임명된 최초의 흑인 여성 판사 콘스턴스 베이커 모틀리 등이 이 소송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여기선 시민권이 장애를 통해 제 모습을 다듬어가는 어떤 상징성도 엿보인다.

1977년 연방 정부 차원에서 장애인에게 시민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재활법 504조’ 투쟁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주디스 휴먼의 모습. 당시의 장애 인권 운동과 주디스 휴먼의 모습은 2020년작 다큐멘터리 영화 &lt;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gt;에도 잘 담겨 있다. 영화 화면 갈무리
1977년 연방 정부 차원에서 장애인에게 시민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재활법 504조’ 투쟁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주디스 휴먼의 모습. 당시의 장애 인권 운동과 주디스 휴먼의 모습은 2020년작 다큐멘터리 영화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에도 잘 담겨 있다. 영화 화면 갈무리

휴먼의 삶과 미국 장애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재활법 504조’ 투쟁이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프로그램이나 활동에 따른 혜택에서 배제, 거부되거나 차별받을 수 없다”는 조항을 재활법에 넣는 것은, 시민권법에 포함되지 못한 장애인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컸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이를 법제화하고 현실화하는 데 늘 주저했고, 그때마다 휴먼과 동료들은 시위와 점거 등 행동에 나서야 했다. 시행 규정에 서명하지 않는 보건교육복지부를 압박하기 위해 펼쳐진 1977년의 전국적 시위는 그 정점에 있다. 100명이 넘는 휴먼과 동료들은 24일 동안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건물을 점거했고, 그 뒤 워싱턴 대표단 파견, 백악관 방문, 촛불 시위 등을 통해 끝내 시행 규정을 통과시켰다. 재활법 504조 투쟁 승리를 바탕으로 장애운동은 더욱 불붙었고, 1990년에는 끝내 시민권법의 틀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미국장애인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 자신이 쓴 대로, 휴먼은 “마흔한 살에야 마침내 동등한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옮긴이가 지적하듯 “미국의 장애 인권사는 재활법 504조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미국장애인법으로 마무리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교적 최근인 2017년에도 미국 장애인들은 트럼프 정부의 의료보장제도 예산 삭감을 반대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법제화는 역사의 어느 단면에서 확인되는 결과일 뿐, 역사는 늘 스스로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한 사람들의 투쟁을 동력으로 굴러간다. 연대와 협력은 고통스러울 만큼 점진적인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휴먼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3류 시민으로 본다면,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당신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당신과 함께 싸워줄 친구들이다.”

전국장애인철폐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21일 오전 지하철 2호선 서울시청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증진을 위한 서울시 선언’ 미이행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공식 사과와 장애인 이동권 완전보장을 요구하는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전국장애인철폐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21일 오전 지하철 2호선 서울시청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증진을 위한 서울시 선언’ 미이행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공식 사과와 장애인 이동권 완전보장을 요구하는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미국 장애 인권 운동의 주역이자 클린턴·오바마 정부에서 행정가로도 일했던 주디스 휴먼(75)의 모습. 사계절 제공
미국 장애 인권 운동의 주역이자 클린턴·오바마 정부에서 행정가로도 일했던 주디스 휴먼(75)의 모습. 사계절 제공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를 점거한 휴먼과 동료들을, 일부 언론이 마치 외국에서나 왔을 법한 ‘불구자 점령군’으로 묘사했었다는 대목이 특히 가슴에 남는다. “당신이 학교에서 우리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학교가 우리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일터에서 우리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 없거나 고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버스나 기차와 같은 대중교통 수단이 접근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당이나 극장에서도 우리는 같은 이유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어디에서 보았는가?”

휴먼의 삶은 단지 그 자신(Heumann)이 되는 것이 곧 인간(Human)이 되는 것임을 일깨운다. 같은 인간 존재로서 평등하다는 것은 그가 어떤 상태에 있든 접근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경사로, 더 넓은 출입구, 안전 손잡이, 수어 통역사, 자막, 음성 안내, 점자 문서, 활동 보조 등은 타인을 위한 ‘비용’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자원’이다.

“이 책을 읽고 한국 사회의 좁고 척박한 인권의 현장에서 장애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조금씩 넓혀왔는지 궁금해진 독자가 있다면, <유언을 만난 세계>(오월의봄, 2021)를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옮긴이)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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