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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렇게 재밌는데 일하고 돈 받아도 되나?

등록 2022-04-01 04:59수정 2022-04-26 09:25

32년간 314종 일본문학 번역
1990년대 등장한 1세대
번역가 되기 전 피시통신 인기작가
재밌고 따뜻해서 지치지 않아
[한겨레Book] 번역가를 찾아서 - 권남희 번역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고 그 끝이 미치도록 궁금한 소설, 이를테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숙명>(2020)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는 어떤 심정으로 일할까.

“오늘치 번역할 생각에 아침에 눈 뜨는 게 기쁘죠.(웃음) 원래는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야 번역에 속도가 나기 때문에 결말을 미리 보지 않고, 하루 일을 마칠 때도 흥미진진해지는 대목에서 그치곤 하거든요. 그런데 딱 한 번, <숙명>은 결말을 미리 봤어요. 이렇게 재밌는 작품을 만날 때면 ‘이 일을 하고 돈을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권남희 번역가는 1990년 호시 신이치의 <신들의 장난>을 시작으로 32년간 314종을 번역한 국내 일문학 번역가 1세대다. 물론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서는 무수히 많았다. 중년의 독자들은 어릴 적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문학전집’이 실은 일본어 전집을 중역한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문학을 ‘일본어’라는 창을 통해 만나는 것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고 흔한 일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때 번역국을 만들어서 서양 원서 수만 종을 번역했잖아요. 당시 국내에 서양 언어보다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흔했으니 일본어 중역이 많은 게 어찌보면 당연해요. 세월이 흘러 원서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여러 언어를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후에도 일본어 번역료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일본어 중역은 계속됐고요. 그런데 정작 일본문학이 국내에 소개되는 경우는 드물었어요.”

1990년대 권남희 번역가를 비롯한 일문학 번역 1세대의 등장은 국내 일본어 번역계를 넘어 출판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이들은 국내에선 생소했던 일본 현대문학을 발굴해 소개하는 민간 에이전시를 자처했을 뿐 아니라, 수준 높은 번역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 한국에 ‘일본문학 붐’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몫을 했다.

“해마다 책을 구하러 일본에 갔어요. 국내 출판사들이 일본문학에 큰 관심이 없는 때여서 40권 제안하면 그중 한 권이 채택될까 말까였는데, 제가 번역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무라카미 류의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1997)도 40분의 1의 확률로 선택된 책이에요.(웃음) 배낭을 메고 일본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게 무슨 삽질인가’ 싶다가도, 히가시노 게이고나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발견했을 땐 눈이 반짝반짝해졌죠. 아쉽게도 당시엔 출간이 불발됐고, 10년 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가들이 됐어요. 제가 시대를 너무 앞서갔나봐요.(웃음)”

선지자들의 땀과 노고에 힘입어 국내에 일본문학 팬층은 갈수록 두터워졌다. 덕분에 권남희 번역가의 일감은 해마다 폭등했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한해 평균 14~15권을 “해치우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쌓인 눈을 쓸어내듯이, 끝없이 밀려드는 일을 쉬지 않고 했다”는데, 괴롭기는커녕 “너무너무 즐거웠던, 번역가로서의 ‘리즈’ 시절”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리즈’ 시절을 보내고도 여전히 한해 평균 10권의 책을 번역하는 한편, 두 해 전 작가로 데뷔해 명성을 더하고 있다.

권남희 번역가의 오랜 팬들은 그의 번역에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있다”고 하는데, 그의 에세이 <귀찮지만 행복해볼까>(2020)와 <혼자여서 좋은 직업>(2021)에는 번역가로 데뷔하기 전 피시통신 유머방의 인기작가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그가 줄곧 해온 “재미있는 글쓰기”의 정수가 담겨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해요. 제 에세이를 처음 읽은 독자들이 ‘하루키 냄새가 난다’고 하시던데, 저도 그의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때 제 글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에 내가 책을 냈으면 표절했다 소리 들을 뻔했네, 라고 리뷰를 썼었죠.(웃음)”

지난 32년간 지치는 법 없이 행복한 번역가로 살 수 있었던 것도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재미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 오가와 이토처럼 착하고 따뜻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권남희 번역가는 말한다. 그의 책 <혼자여서 좋은 직업>이 곧 일본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그는 자신의 책을 일본어 번역서로 만나는 진귀한 경험을 앞두고 있다.

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국내 1세대 일본문학 번역가로 32년간 314종의 작품을 번역한 권남희 번역가. 사진 정의석
국내 1세대 일본문학 번역가로 32년간 314종의 작품을 번역한 권남희 번역가. 사진 정의석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권남희 번역가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비채(2017)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등 세 권으로 구성된 시리즈. “다림질을 하고 장을 보러 다니고 달리기를 하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평범한 생활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습과 위트 넘치는 문장과 유머가 매력적인 에세이”다.

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소미미디어(2020)

2년 전 재출간된 작가의 초기작. “마지막 장을 번역하며 이 사람 역시 천재네, 감탄하다가 마지막 줄을 번역할 때 육성으로 ‘헉!’ 하는 비명이 나왔다. 알고 보니 마지막 줄이 유명한 소설이었다. 장르 소설 번역이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고.

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이봄(2021)

일본을 뒤흔든 꽃뱀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작가는 범인 기지마 가나에가 맛집 탐방을 좋아하고 요리 블로그를 했던 점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썼는데, 덕분에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인데도 읽으면서 식욕이 도는 희한한 소설”이다.

누구

아사이 료 지음, 은행나무(2013)

2013년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작가에게 최연소 수상자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 대학 졸업반 친구 다섯 명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읽고 나면 영혼이 탈곡되는 기분이 든다”고. 권남희 번역가는 “너무 좋은 작품이어서 흥분하여 쓴 역자후기가 옥에 티였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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