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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랑해, 미안해, 행복해…마음 속 말들

등록 2022-04-01 04:59수정 2022-04-01 17:08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설은아 엮음 l 수오서재 l 1만6500원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의 첫 장을 펼치자 먹먹해진다. 가령, 이런 말들. “잘 있니? (…) 너 간 지 벌써 4년 하고 7개월 (…) 김 서방이 연애를 시작했나 봐. 엄마는 섭섭하지만 (…) 딸아. 엄마 갈 때까지, 엄마 너 찾아갈 때까지 잘 있어.” 2만1903번째 부재중 통화를 남긴 이는, 떠난 딸을 그리워한다. “어떻게 새 여자를 안 만나겠냐”며 사위마저 이해하는 엄마의 마음은 애끓는다. 누구에게도 마음 편히 털어놓기 어려웠던 말. 이 책은 이렇게, 마음 속 말들로 채워져 있다.

책 이전에 전시였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전시장에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에서 관람자들은 내밀한 이야기를 꺼냈다. 또 다른 관람자들은 부스 밖 전화기에서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부재중 통화이기에 후련하게 털어놨고 가슴 시리게 들을 수 있었다. 녹음된 부재중 통화는 모두 10만 통, 이 중에 450개를 설은아 작가가 추려 책으로 엮었다. 설 작가는 2018년 한 해 모인 부재중 통화 2690통은 ‘세상의 끝’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의 바람 속에 풀어놨다.

“내가 늙어간다는 것이 너무 서러워”라고 노인은 고백하고, “눈치 보지 않고 퇴사할래요”라고 직장인은 다짐한다. 짝사랑에 힘겨워 “보고 싶어. 전화해도 돼?”라고 혼잣말로 스스로를 달래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 완벽히 사랑받았다는 느낌을 못 받은 거 같아”라며 이혼한 부모를 원망한다. “하루하루 버티고 살고 있”다며 힘겨워 하는 사람도, “내가 하고 싶은 건 하고 살 거”라며 의욕을 불태우는 이도 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쉽지 않지만 다른 이의 삶을 엿들으며 괜스레 위로받고 공감하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읽어나가다 보면 미소짓게 하는 부재중 통화도 만나게 된다. “엄마 나 사실 타투했어. 오른쪽 허벅다리에 엄청 크게.” “내 남자친구는 방시혁을 닮았다. 이왕 닮은 거 재력도 닮았으면 좋겠다”거나 “열일곱 살인데 탈모가 왔다”는, 난감한 고백도 만나게 된다. “너도 누군가의 정답일 거야. 그 누군가가 아직 풀이를 제대로 못 한 모양이지” 같은 기운을 주는 말도 있다.

부재중 통화는 진행형이다. 1522-2290을 타고 쌓여가고 있다. 내밀한 이야기 10만 통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말은, 사랑, 행복, 엄마, 사람, 미안, 아빠, 힘듦, 생각, 친구, 고마움 순이었다. 소통 플랫폼이 범람하는 시대에, 소통에 목마른 이들은 부재중 통화로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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