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책장을 덮은 이른 새벽, 어둑어둑 고요한 시간, 살금살금 밖을 내다봅니다. 목련이 열심히 꽃잎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그 조용한 몸부림이 공감각으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저쪽 목련은 가까스로 자줏빛 봉오리를 만들었고 이쪽은 말갛게 하얀빛까지 어우러져 활짝 피어나기 직전입니다. 양지에서 먼저 터뜨린 꽃은 먼저 어지럽게 떨어질 테지만요.
목련이 지구에 나타난 백악기를 떠올리자니 아득해집니다. 수천만년 전 어딘가에서 뿌리를 내리고 기나긴 시간을 버티고 버텨 한반도 남쪽까지 이르러 오늘 여기에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그 오래전 목련이 피어날 때 벌과 나비는 없었습니다. 목련은 꿀샘이 없는 대신 향이 강하고 널리 퍼지는 까닭이죠.
백악기에는 산호와 조개가 번성했고, 그래서 이 시기 지층 대부분이 석회암을 이루고 있습니다. 분필·석회라는 뜻의 라틴어 크레타(creta)에서 ‘백악’이 유래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배경이거니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고향이기도 한 지중해 크레타섬도 석회석 천지라고 합니다.
“대장, 좋은 생각이 났어요. 듣고 화내면 안 돼요. 대장이 가지고 있는 모든 책을 한곳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립시다. 그러면, 혹시 알아요? 대장은 바보가 아니고, 또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면 대장도 뭔가를 좀 알게 되지 않을까요?”
조르바의 일갈에 ‘나’는 ‘돈오’의 순간에 다가섭니다. 앎에 갇힌 데서 벗어나 책에 종속된 지식과 사상을 딛고 일어설 때 자유는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그렇게 해서 카잔차키스는 이런 묘비명을 남겼겠죠.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김진철 책지성팀장 nowhere@hani.co.kr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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