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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작가 나보코프, 만나 보실래요?

등록 2022-04-08 04:59수정 2022-04-08 10:00

나보코프 단편 68편 실린 전집
망명 작가의 향수와 분노에서
나비 채집 취미와 언어 실험까지
‘롤리타’ 등 다른 작품 떠오르게도
러시아 출신 미국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가 쓴 단편 68편을 모두 모은 <나보코프 단편전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 Time Inc/ Katz Pictures
러시아 출신 미국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가 쓴 단편 68편을 모두 모은 <나보코프 단편전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 Time Inc/ Katz Pictures

나보코프 단편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l 문학동네 l 4만3000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롤리타>와 <창백한 불꽃> 같은 장편들로 유명하지만, 그가 단편 역시 부지런히 썼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졌다. 1899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나보코프는 1917년 혁명 뒤 유럽으로 망명해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전전하다가 미국 시민이 되었다. 러시아어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프랑스어를 거쳐 결국 영어에 정착했으며, 시에서 출발해 희곡을 거쳐 소설을 자신의 장르로 삼았다.

미국에서 2008년에 나온 <나보코프 단편전집>에는 그의 단편 68편이 실렸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나보코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옮긴이 김윤하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나보코프는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이 같은 방식으로 창작된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나비 채집 취미를 지니고 있었던 그가 나비의 변이형에 빗대어 장편과 단편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이채롭다.

“인시류의 많은 종이 수목한계선 위에서는 크기는 작으나 성장 위축은 아닌 자손들을 남기며 번식합니다. 단편소설은 중간 변이 과정으로 연결된 같은 종의 특정 장편소설과 비교하면, 작은 고산지대나 극지대에 나타나는 변이의 형식을 보여줍니다.”

나보코프의 첫 단편 발표작은 1921년 그의 아버지가 편집을 맡고 있던 베를린의 러시아어 신문 <방향타>에 발표한 ‘숲의 정령’이다.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이 작품에서 ‘몽상가’인 주인공은 어느 날 밤 숲의 정령의 방문을 받는다. 정령은 자신이 “다른 모든 이들처럼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어” 이곳 유럽에 왔노라고 말하는데, 버리고 온 조국 루스(러시아)를 “그대”라 부르며 그리워하는 정령의 목소리에는 망명객 나보코프 자신의 심정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루스여, 우리야말로 그대의 영감이자 그대의 심원한 아름다움이며, 아득히 먼 옛날부터 지속한 매혹인 것을! 그런 우리가 미쳐 날뛰는 측량기사에게 모두 추방되어 떠나버리고 사라졌으니.”

1923년 <방향타>에 실린 ‘단어’에서도 “검은 가사 상태에 빠진” 고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절절히 그려진다. 역시 1923년에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어 합니다’에서는 자신의 담뱃가게에 찾아온 소련 비밀경찰 요원을 체포해 ‘종신형’을 선고하고 집 안에 감금한 망명객 부자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아들이 베를린의 소비에트 상점에서 볼셰비키 망치와 레닌 흉상을 구매해서는 그 자리에서 망치로 흉상을 때려 부수는 장면은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나보코프 자신의 거부감과 분노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1939년에 발표된 ‘박물관 방문’에서는 카프카적 혼돈과 미로의 양상을 보이는 프랑스의 한 박물관에서 헤매던 주인공이 어찌된 일인지 혁명 이후 러시아 땅에 도착한 뒤 “불법 입국자”인 자신의 처지 때문에 공포에 떠는 상황이 묘사된다.

나보코프의 나비 채집 취미는 그의 단편들 여러 곳에 흔적을 남겼는데, 제목에서부터 나비 연구가를 뜻하는 ‘오릴리언’은 병적일 정도로 간절하게 나비 채집을 위한 외국 여행을 꿈꾸던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비 문제로 엄두를 내지 못하던 나비 채집 여행을 마침내 떠날 수 있게 된 주인공이 출발 직전에 돌연 쓰러지는 결말이 안타깝지만, 이국의 온갖 나비들을 만나는 상상 속에 맞았을 그의 죽음이 아주 슬프게만은 그려지지 않는다.

나보코프의 단편들은 그가 썼거나 쓰려 했던 장편의 일부를 독립시킨 것들도 있고, 자전적 회상록 <말하라, 기억이여>와 겹치는 이야기도 있다. 단편 ‘명아주’에 붙인 주석에서 나보코프는 이 작품이 <말하라, 기억이여> 제9장의 후반부와 흡사한 세부를 지녔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허구의 모자이크 사이사이에 <말하라, 기억이여>에서는 기술되지 않은 실제 기억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베레좁스키’라는 이름의 교사(당시 인기 있던 지리학자 베레진이다)와 관련된 구절이나 학교 싸움꾼과 한 주먹다짐이 그렇다. 장소는 상트페테르부르크, 1910년경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 <롤리타>(1955)를 연상시키는 작품도 있어서 눈길을 끈다. 1926년작인 ‘동화’가 그것인데, 수줍음 때문에 이성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남자 에르빈이 매력적인 여성들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하렘을 꿈꾸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남성 노인이 열네살 정도 돼 보이는 매력적인 소녀를 데리고 걸어가는 장면이 <롤리타>를 ‘예고’하는 듯하다고 나보코프는 주석에서 쓴다.

“1930년 이후로 나는 내 작품 ‘동화’를 다시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번역 작업을 하면서 다시 읽다가, 거의 반세기 전에 쓴 단편소설 속에 다소 나이가 많긴 하지만 영락없는 험버트가 그의 님펫을 에스코트하는 장면을 발견하고는 오싹해질 정도로 깜짝 놀랐다.”

나보코프는 코넬대학에서 러시아문학과 유럽문학을 강의했고 하버드대학 강의록을 <나보코프 문학 강의> <러시아문학 강의> 같은 책들로 묶어 내기도 했다. 이번 책에 실린 단편들과 주석들에는 문학에 관한 그의 생각도 들어 있다. “나는 예술은 정치와 접촉하자마자 필연적으로 어느 사상에서든 쓰레기 수준으로 전락해버린다고, 총살당한다 해도 계속 주장할 것이다”(‘피알타의 봄’)와 같은 대목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 주석들에서 내비치는 ‘자뻑’은 예술가 특유의 자부심을 감안해도 다소 과하다 싶은 느낌을 준다. 이런 식이다.

“이 단편은 다소 유사한 사상의 음영을 공유하지만 그 치명적인 결함은 전혀 공유하지 않은 사르트르의 <구토>보다 적어도 십이 년은 앞서 있다”(‘공포’ 주석)

“이 이야기에서 서술자는 죽은 두 여성이 이야기에 자신들이 신비롭게 관여했음을 주장하기 위해 마지막 문단을 아크로스틱(삼행시와 비슷한 말장난)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이 특별한 속임수는 소설의 천 년 역사에서 오직 한 번만 시도할 수 있다”(‘베인가의 자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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