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0은 언젠가 1이 될 수 있을까

등록 2022-04-22 04:59수정 2022-04-22 11:36

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l 한겨레출판 l 1만4000원

“유령이 또 왔네.” “네?” “유령이라고.” “제가요?” “원래 유령은 자기가 유령인지 몰라.”

채용사이트에서 ‘여성’과 ‘30세’로 조건을 설정해 검색한 공고를 보고 면접 보러 간 약국에서 ‘나’는 고용주 약사로부터 다짜고짜 이런 말을 듣는다. 약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지만 ‘나’는 유령이 되기로 한다. “상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유령이 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이직한 회사도 문을 닫는 바람에 ‘백수’가 된 주인공은 약국 안쪽, 환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조제실에서 일하는 유령 노동자가 된다. 그가 일하는 플라워약국에는 또 다른 유령인 조부장이 있다. 약의 이름을 외우고, 처방전을 입력하고, 약사의 시덥잖고 때로 선 넘는 잡담까지 감당하는 일을 익혀간다. 작가가 칭하는 유령은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영’과도 이어져 있다. “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0에 가까운 자신을 체감하게 된다. 첫 출근날에는 0.0000001쯤 되는 기분이었다.” 아직 존재감이 선명하지 않은 무엇,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유령은 0과 1 사이의 어떤 존재다. 세상은 이른바 ‘밥값하는’ 온전한 존재가 되라고, 완전한 한 사람의 몫을 하는 1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좀처럼 그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주인공은 한 달의 수습기간을 넘기고 유령으로 일하는 데 적응해간다.

신인 작가 고민실(사진)의 첫 장편 <영의 자리>는 취업난에 허덕이며 사회 안에서 존재가치까지 부정 당하는 젊은 세대의 고민과 질문을 녹여낸 작품이다. “일곱번째 직장을 다니던 중에 초고를 완성했”다는 작가의 말에서 기성세대의 관찰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 세대의 온도가 작품 안에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암울하고 막막한 현실의 이야기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긴 에필로그처럼 자리 잡은 2장에서 작가는 느슨한 공감과 연대의 관계에 대해 쓴다. 물론 이것은 아마도 1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기성세대에게는 희망이나 해결책으로 보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0이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는 어떤 미래를 향해 “어디선가 미지의 생물이 부상하는 소리”를 누군가는 이미 듣고 있을지 모른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한겨레출판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