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l 한겨레출판 l 1만4000원
“유령이 또 왔네.” “네?” “유령이라고.” “제가요?” “원래 유령은 자기가 유령인지 몰라.”
채용사이트에서 ‘여성’과 ‘30세’로 조건을 설정해 검색한 공고를 보고 면접 보러 간 약국에서 ‘나’는 고용주 약사로부터 다짜고짜 이런 말을 듣는다. 약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지만 ‘나’는 유령이 되기로 한다. “상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유령이 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이직한 회사도 문을 닫는 바람에 ‘백수’가 된 주인공은 약국 안쪽, 환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조제실에서 일하는 유령 노동자가 된다. 그가 일하는 플라워약국에는 또 다른 유령인 조부장이 있다. 약의 이름을 외우고, 처방전을 입력하고, 약사의 시덥잖고 때로 선 넘는 잡담까지 감당하는 일을 익혀간다. 작가가 칭하는 유령은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영’과도 이어져 있다. “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0에 가까운 자신을 체감하게 된다. 첫 출근날에는 0.0000001쯤 되는 기분이었다.” 아직 존재감이 선명하지 않은 무엇,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유령은 0과 1 사이의 어떤 존재다. 세상은 이른바 ‘밥값하는’ 온전한 존재가 되라고, 완전한 한 사람의 몫을 하는 1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좀처럼 그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주인공은 한 달의 수습기간을 넘기고 유령으로 일하는 데 적응해간다.
신인 작가 고민실(
사진)의 첫 장편 <영의 자리>는 취업난에 허덕이며 사회 안에서 존재가치까지 부정 당하는 젊은 세대의 고민과 질문을 녹여낸 작품이다. “일곱번째 직장을 다니던 중에 초고를 완성했”다는 작가의 말에서 기성세대의 관찰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 세대의 온도가 작품 안에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암울하고 막막한 현실의 이야기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긴 에필로그처럼 자리 잡은 2장에서 작가는 느슨한 공감과 연대의 관계에 대해 쓴다. 물론 이것은 아마도 1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기성세대에게는 희망이나 해결책으로 보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0이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는 어떤 미래를 향해 “어디선가 미지의 생물이 부상하는 소리”를 누군가는 이미 듣고 있을지 모른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한겨레출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