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
만년샤쓰
방정환 지음, 김세현 그림, 장정희 해설 l 길벗어린이(2019)
그림책 <만년샤쓰>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신파극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주인공 창남이는 가난한 형편에도 구김살 없이 살아가는 어린이다. 장난스러운 말로 선생님과 동무들을 웃게 하는 한편 토론도 잘하고 곤란한 동무에게 좋은 의견도 잘 내는데 정작 자기 신상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어느 추운 날 창남이는 다 떨어진 구두를 새끼줄로 묶어 신고 와 주변의 웃음을 산다. 그래도 태평하기만 했다. 그런데 체조 시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웃옷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샤쓰(셔츠)만 입고 운동을 하라는 것이다. 어쩐 일인지 쭈뼛대던 창남이가 선생님의 호통에 마지못해 웃옷을 벗자 맨몸이 드러난다. ‘만년샤쓰’. 옷이 없는 창남이에게는 맨몸이 곧 샤쓰였던 것이다. 이를 본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며 창남이를 위로할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 창남이를 본받으라는 연설을 한다.
다음 날 창남이는 다 떨어진 얇은 바지를 입고 나타난다. 동네에 불이 나서 세간을 반이나 잃은 마당에 남은 옷을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창남이에게 착한 일을 하도록 한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들의 처지를 알지 못한다. 주인공이 돋보여야 한다지만, 어린이가 이렇게 가혹한 환경에 놓여도 될까. 뒤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독자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설정도 민망했다. 작품의 존재 자체가 의미는 있지만, 낡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담백한 동양화의 사려 깊고 따뜻한 표현에도 솔직히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1920년대의 어린이에게는 창남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지키지 못하던 일제강점기에 어린이의 처지는 실제로 창남이와 같았다. 헐벗고 굶주렸으며, 웃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현실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1923년 방정환이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아 주시오”로 시작되는 어린이 선언문을 작성했을 때, 어린이날은 길에 쓰러진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안아 일으키는 것이 가장 급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어린이들이 다음 세대의 어린이들을 구했다.
올해 어린이날은 100주년을 맞이한다. 어린이날에는 늘 시대적 사명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 중에는 어린이를 먹이고 가르치는 일이, 급속한 경제 발전 시기에는 빈부 격차의 그늘에 있는 어린이를 돌보는 것이, 씨랜드에서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는 어린이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어린이날 어른들이 했던 일, 또는 해야 했던 일이다. 나는 100년 동안 더 많은 어린이와 어른이 창남이처럼 착하고 용감하게 어려움을 이겨냈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고 믿는다. 2022년에도 그럴 것이다. ‘노키즈존’에 반대하고, 어린이보호구역을 지키고,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어른들이 어린이 곁에 있을 것이다. 해마다 어린이날은 첫 번째 어린이날이다. 초등 1~2학년.
독서교육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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