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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혁명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낸, 아방가르드의 현대성

등록 2022-05-06 04:59수정 2022-05-06 12:06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왼쪽)와 소련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오른쪽). 문학과지성사 제공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왼쪽)와 소련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오른쪽). 문학과지성사 제공

혁명의 넝마주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김수환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2만원

혁명과 미학을 하나로 엮어냈다는 ‘소비에트(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성취물들은, 1910~20년대 황금기를 맞았다는 설명과 함께 오늘날 안온한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을 망각으로부터 구원해내기 위해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호랑이의 도약”을 말했던 발터 베냐민의 눈으로 역사의 결을 거꾸로 솔질해 본다면, 우리는 소비에트 아방가르드로부터 전혀 새로운 것들을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러시아발 문화기호학 등을 깊이 연구해온 김수환 한국외대 러시아학과 교수는 새 책 <혁명의 넝마주이>에서 베냐민이 혁명기 모스크바(1926~1927년)를 방문해 썼던 <모스크바 일기>를 다시 읽으며 바로 이런 작업을 펼친다. 혁명기 러시아 예술가들은 과거와의 과격한 단절을 통해 혁명과 조응하는 예술을 펼치고자 했으나, 1934년 과거회귀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선포한 스탈린 시대에 ‘억압적 권력에 말살당했다’는 것이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혁명의 날 이른 새벽의 한 넝마주이”가 된 베냐민이 모스크바 방문 때 진정으로 주어담은 것이 무엇이었나 살펴보며,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상실된 노선”을 되새긴다. 말레비치, 로드첸코가 아니라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와 ‘팩토그래피’, 보리스 아르바토프와 ‘사물론’, ‘러시아 우주론’ 같은 낯선 이름과 개념들이 주역이며, 그 전성기도 1910~20년대가 아닌 1920~30년대다.

소비에트의 진정한 변화는 1928~32년부터의 급격한 ‘건설’(산업화)의 경험에 있었으며, 이는 일부 아방가르드 활동가들이 ‘팩토그래피’ 운동을 제기하는 계기가 됐다. 이들은 예술을 “단지 혁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혁명에 ‘본질적인 것’으로 재형성”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예술은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생산 현장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직접 구축해내는 ‘작동적’(operational) 구실을 해야 한다고 봤다. 특히 문학과 언어에 기반을 둔 요소들을 내팽개쳤던 1세대 생산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정보·기술·대중과 같은 매체 영역에 주목했다. 집단농장에 들어가 트랙터 대금 모금, 신문 제작, 순회영화관 등을 조직하는 등 전방위 활동을 벌인 트레티야코프는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이론가이자 활동가였다.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연출가 메이예르홀트의 ‘생체역학’ 연기 장면. 문학과지성사 제공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연출가 메이예르홀트의 ‘생체역학’ 연기 장면. 문학과지성사 제공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예술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만든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문학과지성사 제공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예술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만든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문학과지성사 제공

지은이는 아우라에서 해방된 ‘대중’의 잠재력, 기술, 투쟁하고 개입하는 ‘생산자로서의 작가’ 같은 베냐민의 사유가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풀이하는 한편, 소비에트 아방가르드가 지녔던 놀랄 만한 현대성에 주목한다. 팩토그래피 이론과 활동에는 새로 펼쳐진 대량생산과 매스미디어 환경 속에서 ‘예술가는 프롤레타리아와 어떻게 연대하고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서려 있었다. 그 문제의식은 단지 권력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공식 예술의 표준을 제시하고 그것의 후원자를 자임하는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후 국가가 아닌 ‘시장’이 지배하고 후원하는 서구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제히 부활했다.”

소비에트 아방가르드가 나아간 가장 흥미로운 지점으로 보리스 아르바토프가 주창한 ‘사물론’을 들 수 있다. 아르바토프는 혁명은 ‘생산수단으로서의 사물’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사물’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봤으며, 이를 위해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의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사물들을 ‘함께 노동하는 동료’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려 시도했다. 접이식 가구, 무빙워크, 회전문, 에스컬레이터 등 “사물은 기능적이면서도 능동적인 것이 되어 인간의 실천에 동료 노동자처럼 연결”된다는 그의 사유는, “과속방지턱을 ‘행위자’로 추켜세우는 브뤼노 라투르를 선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1860년대 니콜라이 표도르프가 창시해 혁명기에 큰 영향을 미쳤던 ‘러시아 우주론’은 또 어떤가? 표도르프는 인간의 진보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온 우주뿐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을 되살리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며 ‘모두를 위한 불멸’을 주장했다. “전체 우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기꺼이 떠안고자 하는 새로운 인류학적 스탠스”다. ‘인류세’를 말하는 오늘날의 담론들은 과연 이 정도의 “발본적인 극단성”에 이를 수 있을까? ‘러시아 우주론’이 바라고 꿈꾸었던 것 대부분은, 이제 혁명적 요구가 아니라 일론 머스크 같은 억만장자들이 투자하는 “오만과 키치”가 되어버리고 만 건 아닐까?

무엇보다 지은이는 과거란 있었던 사실들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해서 쟁취해내야 할 유산임을 강조한다. 주어진 것 말고는 어떤 다른 것도 상상하기 힘든 오늘날,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과거는 더욱 절실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지은이는 “실현되지 못한 모든 것의 구름이 실현된 사건들을 둘러싸고 있다”는 유리 로트만의 말을 인용하며, “모든 진정한 과거는 현재와 새롭게 만나 다시 써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되새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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