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서사와 한국소설사론
임형택 지음 l 소명출판 l 6만5000원
임형택(79)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우리 한문 문학을 전공 분야로 삼은 한문학자이자 조선시대 국문 소설과 20세기 근대 소설 분야에 연구 역량을 쏟아온 국문학자다. <동아시아 서사와 한국소설사론>은 50여년에 걸친 지은이의 학문 활동을 총괄하는 저작이다. 15세기 김시습의 <금오신화>부터 조선 후기 한문소설과 근대전환기 신소설, 1920년대 이후 근대 소설까지 500년의 우리 소설사를 전체 6부의 방대한 분량에 담았다. 지은이의 학문 시야와 성취를 한눈을 볼 수 있는 책이다.
눈여겨볼 것은 이 책이 한국소설사론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서사’에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제1부에 이 주제를 천착한 글 두 편을 실어 총론으로 삼았다. 한국·중국·일본·베트남을 아울러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으로 설정하고 이 문화권의 서사 양식을 비교해 검토하는 글이다. 지은이는 입론의 편의를 위해 한국과 중국으로 영역을 한정하고 자신의 관심사인 소설 분야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한문이라는 공통 문어를 공유하던 한국과 중국에서 근대전환기를 거치며 문학 언어가 각각의 민족어로 개별화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먼저 전근대 시기의 두 나라 서사 양식을 비교하는 방편으로 지은이가 끌어들이는 것이 17세기에 쓰인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과 18세기 청대 소설 <홍루몽>이다. 두 작품은 각각 전근대 시기의 조선과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꼽힌다. 흥미로운 것은 두 작품이 모두 ‘몽’으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구운몽>은 주인공이 꾸는 꿈을 액자로 삼아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며, <홍루몽>은 액자 구조는 아니지만 “처음부터 모두 다 꿈이던 것을 세인들의 어리석음 비웃지 말라”는 말로 이야기를 닫음으로써 작품에 그려진 파란만장한 인생이 온통 꿈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야기의 틀이 유사한 셈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성격은 아주 다르다. <구운몽>의 주인공 양소유가 유교문화의 전형적인 출세지향형 인물인 데 반해, <홍루몽>의 주인공 가보옥은 공명과 충효를 떠벌리는 자들을 ‘봉록을 훔치는 좀벌레’로 치부하는 반시대적인 인물이다. 두 주인공의 이런 성격 차이가 이야기를 아주 다른 양상으로 끌고 간다.
중국 근대 문학의 최고봉 루쉰. <한겨레> 자료사진
이렇게 전근대 시기에 소설 양식이 흥성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조선이든 중국이든 본령은 ‘시문 위주의 정통문학’이었다. 소설이 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한 것은 근대전환기 이후의 일이다. 지은이는 이 전환점이 된 시기를 한국은 3·1운동 이후로, 중국은 5·4운동 이후로 본다. 1919년 거의 동시에 발생한 이 민족사적 사건과 함께 문학에서 대변화가 일어났다. 지은이는 이 시기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루쉰의 <아큐정전>과 염상섭의 <만세전>을 든다. 두 작품은 모두 중편 규모인데다 똑같이 1920년대 초에 집필됐다. <아큐정전>이 근대 공화주의 혁명인 신해혁명의 좌절을 뼈저리게 성찰하는 작품이라면, <만세전>은 3·1운동의 사회적 배경을 암울한 화폭에 담은 작품이자 민족 현실을 발견함으로써 자아를 재정립해가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두 작품은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분명하다. <아큐정전>은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아큐’라는 주인공은 주거부정의 날품팔이에다 결함투성이 인간인데, 제목은 그런 인간의 ‘정전’을 쓴다고 선언하는 꼴이다. 정전이라는 말을 패러디함으로써 전통에 정면으로 맞서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조반’의 작가의식이 두드러진다. 지은이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이 소설이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소설이라는 주변부 문학을 백화문이라는 민중어로 축조해 유가적 ‘문화장성’을 허물어뜨리는 무기로 삼는 것이다.
<만세전> <삼대>의 작가 염상섭. <한겨레> 자료사진
<만세전>도 전통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정신을 내세운다는 점에서는 <아큐정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큐정전>이 백화문을 앞세워 전통 문학과 맞대결하는 것과 달리 <만세전>은 문학적 전통과 직접 대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은 애국계몽기에 등장한 국한문혼용체를 계승해 소설 언어로 삼는다. 지은이는 그 이유를 국한문체가 전근대의 한문체에 대항하는 근대 계몽기의 문체적 대변자였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국한문체에 담긴 계몽주의 정신을 <만세전>이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한문체는 <만세전>이 출간된 직후부터 한글 전용의 국문체로 급속히 바뀌었다. 지은이는 당시 문인들의 사상이 계몽주의를 넘어 더 급진화한 것이 이런 변화를 이끌었다고 해석한다. 사상의 변화가 문체의 변화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계몽운동이 낳은 국한문체가 계몽운동의 낙후화와 함께 단숨에 퇴출당한 것이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한겨레> 자료 사진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염상섭의 다른 장편소설 <삼대>와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 대한 탐구다. <임꺽정>은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신문에 연재됐고, <삼대>는 1931년에 발표됐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먼저 정치적 활동으로 주목을 끈다. 프롤레타리아문예운동을 이끌던 홍명희는 1927년 좌우파 통합단체 신간회를 발의해 주도했는데, 이 신간회 활동 시기에 집필을 시작한 것이 <임꺽정>이다. <임꺽정>은 좌우를 아우르려는 작가의 실천적 의지가 문학으로 표출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임꺽정>의 성취를 이렇게 평한다. “<임꺽정>은 민족문학의 위대한 성과다. 그 민족문학적 성격은 계급문학에 대척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한 현실주의 민족문학이다.”
지은이는 염상섭의 <삼대>도 <임꺽정>과 유사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의 뜻을 담고 있되, 사회주의에 공감하면서도 추종하는 입장은 아닌 (…) 어떤 중간파적 태도를 보여준다.” 염상섭은 1930년대에 문학이 가야 할 길을 ‘중정(中正)의 길’이라고 밝혔다. 곧 ‘우로 후퇴하지도 않고 좌로 편향되지도 않는’ 길이다. 지은이는 이 <삼대>의 작가에게서 근대에 적응함과 동시에 근대를 극복하려는 ‘리얼리즘의 작가정신’을 읽어낸다. 그렇게 보면 한국과 중국에서 근대 문학의 최고 수위에 오른 루쉰과 홍명희와 염상섭이 모두 이념적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근대를 둘러싼 난제를 돌파하려는 문학적 투혼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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